"자네, 진정 역사학자가 꿈인가? 당신 집안 역사에 대해 논문을 써보는 게 어떻겠나. 브레게에 대해서 말일세."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경제사를 공부하던 스무 살 청년 에마뉘엘 브레게에게 담당 교수가 말했다. '브레게'란 이름이 말해주듯, 에마뉘엘은 1775년 파리에서 브레게를 창업한 스위스 출신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의 직계 7대손이다. 창업자 브레게는 나폴레옹과 루이 18세,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계를 만들었던, 말하자면 '궁정 시계연구 학자'였다.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 7대손인 에마뉘엘 브레게는 "새로운 특허를 뜯어보면 결국 역사적 기록에서 영감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만 해도 에마뉘엘에게 '시계 역사학자'는 인생 항로에 예정하지 않은 길이었다. 4대손까지 집안 경영으로 명맥을 이었지만, 이후 항공 산업 등으로 눈을 돌리면서 정작 시계는 여러 다른 주인의 손을 거치게 됐기 때문이다. "'당신이 곧 시계의 역사'라는 조언에 정신이 번뜩 들더군요. 주인이 누구든 간에, 중요한 건 선조의 유산을 지키고 알리는 이가 있어야 미래도 존재할 수 있다는 거였지요. 기술 혁신사를 공부했었기에 '시계도 결국은 기술 변화의 단면이잖아! 해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12일 '스위스 시계 브랜드' 브레게 마린 컬렉션 론칭을 위해 한국을 처음 찾은 에마뉘엘 브레게(57) 총괄 부회장에겐 이름에 앞서 '시계 역사학자'라는 호칭이 먼저 붙는다.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 지방 도서관까지 곳곳을 뒤졌어요. 러시아 크렘린 박물관에서 정확한 이력 없이 보관됐던 브레게의 옛 자료를 찾아낼 수 있었죠. 1983년 전시 중 도난당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계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왕실을 넘어 해외 사교계에 작품이 전파되는 경로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가 중요한 건 예술과 건축계에 퍼져 있던 신고전주의가 시계 디자인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에요. 이후 시계 디자인의 역사가 바뀝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보석 장식품에 가까웠던 시계가, 편평한 다이얼(전면)에 인덱스(시간을 가리키는 숫자) 등 우리가 익히 아는 간결한 디자인이 된 건 모두 브레게 덕분이었다.

2005년 니콜라스 하예에크 당시 브레게 회장의 복원 프로젝트로 3년만에 완성한 마리 앙투아네트 시계(원의 왼쪽)와 1783년 앙투아네트가 브레게에게 의뢰한 시계(원의 오른쪽). 현대적인 시계 원형인 셀프 와인딩(로터가 돌아서 태엽이 감기는) 오토매틱으로 지금까지도 가장 복잡한 시계 중 하나다.

그는 "시계는 시간을 알려주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의 선조이자 발명가인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가 당대 유명 수학자인 라플라스 등과 함께 지구상 경도 등을 측정하는 프랑스 경도국 위원으로 임명된 것을 그 예로 들었다. "수학자, 천문학자, 시계 연구가들이 모여 천체의 움직임을 연구했습니다. 이들의 연구는 항해자와 해군에게 생명줄이기도 했지요. '완벽한 도구에 자신의 운명을 맡긴 학자와 선원들'이라고 당시 브레게가 표현한 기록이 있습니다." 중력과의 오차를 최소화해 극도의 정확성을 기하는 '투르비용'을 만들어낸 것도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 그가 후대에게 '시계사의 스티브 잡스'라고 불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에마뉘엘은 "고객이 곧 시계의 역사"라고 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수년간을 제외하고 손으로 직접 쓴 모든 고객에 대한 기록을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작품에서 브레게를 언급한 작가 푸시킨이나 발자크도 단골. 일부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요즘' 고객을 제외하곤 여전히 수기와 컴퓨터로 모든 기록을 남긴다. 수많은 고객 중 그가 최근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건 윈스턴 처칠이다. "자신이 평생 착용한 '브레게 No. 765'를 어떤 위기의 순간에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시계가 생명줄이었듯, 시시각각 정확하게 진실을 알리는 것이 결국은 사람을 구해내는 것이라는 그의 믿음이 있었죠. 영화 '다키스트 아워' 제작진이 처칠 가문에 빌려달라 했지만 진품은 영국 전쟁 박물관에 보관돼 불가능했어요. 제작사에서 요청을 해와 똑같은 제품을 만들었지요." 그는 "시대를 내다보는 힘은 역사를 돌아보는 데에서 온다"며 싱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