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완 논설위원 겸 과학전문기자

외계인이 고대 문명을 탄생시켰다는 얘기가 있다. 이를테면 이집트의 거대한 피라미드는 당시 인간의 기술 수준으로는 세울 수가 없었으며, 결국 우주인이 전해준 첨단 과학기술로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이집트 외에 잉카나 마야 등의 고대 문명도 같은 논리로 설명한다. 그럴듯한 증거도 제시된다. 키니치 하나브 파칼은 고대 마야의 도시국가인 팔렌케를 다스렸던 왕이다. 683년 죽은 왕의 석관 뚜껑엔 마치 사람이 우주선을 타고 하늘을 나는 것 같은 모습이 새겨져 있다. 스위스 고고학자인 에리히 폰 데니켄은 "외계인이 탄 우주선의 착륙 장면"이라고 주장했다.

과학자들은 그동안 이런 주장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재미삼아 하는 얘기에 정색하고 달려들면 오히려 이미지만 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사이 허구가 사실로 둔갑했다. 지난 12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는 지난해 미국 채프먼대의 조사 결과를 인용해 미국에서 고대에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했다고 믿는다고 답한 사람이 응답자의 41%나 됐다고 전했다. 2016년 조사에서는 27%였다. 하루아침에 바다로 가라앉았다는 아틀란티스도 2016년에는 40%가 믿는다고 했는데 이 역시 작년엔 57%로 늘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과학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난 2월 유명 코미디언 조 로건은 자신의 인터넷 방송에서 파칼왕의 석관이 우주선을 묘사했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며 주류 고고학자들의 의견을 구했다. 이에 미국 래드퍼드대의 데이비드 앤더슨 교수는 소셜미디어에 "파칼왕의 석관은 죽음의 순간 왕이 저승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는 글을 올렸다.

앤더슨 교수는 "사람들이 그림을 가로로만 보고 우주선이 나는 모습이라고 하는데 실상은 세로로 봐야 한다"고 했다. 로켓의 화염처럼 보이는 부분은 마야 문명에서 지하세계를 표현한 그림이며, 우주선 같은 모양은 마야 예술에서 자주 등장하는 세계수(世界樹), 즉 세계의 중심에 있는 나무라고 설명했다.

고고학자들은 사이비 고고학이 심각한 인종주의(人種主義)를 조장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심지어 고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아틀란티스처럼 백인이 세운 문명이 먼저 있었다고까지 주장한다. 따라서 나중에 유럽인들이 식민지를 세운 것은 옛 땅을 회복한 일과 같다고 말한다. 실제로 미국 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은 북미에 고대 바이킹이 세운 문명이 있었다는 주장을 근거로 원주민 축출을 정당화했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지금도 똑같은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이 인종주의에 악용되기는 유전학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10월 미국 뉴욕타임스는 한 과학 기사에서 2017년 2월 백인 우월주의자 모임에서 윗옷을 벗은 남성들이 우유를 들이켜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소개했다. 백인은 대부분 몸에서 우유에 들어 있는 당분인 유당(乳糖)을 분해하는 효소가 있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인들은 이 효소가 적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백인이 우월한 과학적 증거"라며 "우유를 마실 수 없다면 미국에서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모든 괴담(怪談)이 그렇듯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주장은 사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섞었다. 인간의 유당 분해 효소는 대부분 유아기를 거치면서 작동을 멈춘다. 그러던 것이 5000년 전 유럽에 목축이 발전하면서 성인이 돼서도 유당 분해 효소가 작동하는 돌연변이가 생존에 유리해졌다. 이로 인해 오늘날 대부분의 유럽인은 우유를 먹어도 문제가 없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돌연변이는 아프리카와 중동의 목축민들에서 먼저 일어났다. 시기상으로 유럽보다 앞선다. 인류의 조상들이 아프리카를 떠나 유럽으로 이주하면서 유당 효소 돌연변이도 따라갔을 뿐이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이런 사실은 외면한다. 또 백인 중에서도 유당 효소가 없는 사람들이 일정 비율로 있다.

버젓이 횡행하는 이런 '비과학'에 최근 과학자들이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지난해 10월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미국인간유전학회는 "인종차별의 이데올로기에 유전학을 이용하는 것을 비판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모든 인간은 유전 정보가 담긴 DNA가 99.9% 같다. 인종 간 차이로 보이는 다양성은 인류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진화한 결과일 뿐이다. 과학자들은 아예 인종이란 말을 거부하자고 주장한다. 최근 국내에서도 '퇴마' '빙의' 같은 비과학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방송이 늘었다. 자라나는 세대가 사실과 허구를 혼동하지 않도록 과학자들의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