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한옥에는 마당이라는 '빈 공간'이 있다. 하지만 화강암 가루인 마사토가 깔린 마당은 그냥 비워둔 게 아니다. 햇빛을 반사하여 집 안을 밝게 해주고, 한여름 무더울 때에는 물 한 동이를 뿌려주면 천연 에어컨 역할을 해낸다. 마당은 오밀조밀 꾸미지 않고 기껏해야 배롱나무나 단풍나무를 심었다. 사시사철 변하는 바깥 세계를 담는 '여백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한옥 마당의 분위기가 서울 도심의 현대적인 건축물에서 재현되었다.

아모레 퍼시픽 본사의 옥상 정원(위)과 아트리움 천장, 2017년 개관.

2010년 12월 아모레 퍼시픽 건축 자문위원단은 신사옥 건립 계획의 수립을 위하여 국제 공모로 다섯 팀을 뽑았다. 각 팀의 디자인 시안과 모형에 대한 평가 결과,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David Chipperfield)의 작품이 뽑혔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순응, 단순, 소박함이라는 한국의 전통미를 살린 건축 개념이 돋보인 덕분이다. 화려한 기교 대신 절제된 아름다움을 지닌 단아한 외관과 세부 처리가 편안한 느낌이 든다. 특히, 전통 한옥의 중정(中庭)을 재해석하여 만든 옥상 정원을 건물의 세 곳(5·7·17층)에 배치한 게 호평을 받았다.

5층의 옥상 정원은 얕은 연못(깊이 8㎝)가에 조성된 나지막한 둔덕에 심은 토종 줄기 식물들과 청단풍나무들이 어우러져서 마당의 정취가 느껴진다. 못의 바닥은 로비가 있는 아트리움의 천장(높이 18m)이므로 채광 등을 위해 특수 유리로 마감했다. 못에 물을 채우면 햇빛이 물결에 일렁이며 격자무늬 천장을 투과하여 아트리움에 신비로운 분위기가 형성된다.

한옥 마당의 가치를 간파한 영국 건축가가 재현해낸 옥상 정원은 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망중한(忙中閑)을 즐기게 해준다. 여백 공간을 마련해둔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확산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