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 양 전 대법원장 측은 1심 재판이 본격화하기 전 검찰의 공소장이 일본주의에 위배된다는 지적을 했고, 재판부도 “불필요한 부분이 기재됐다”고 지적했다.

전두환·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 정봉주 전 의원, 이재명 경기지사… 이들 모두 재판을 받고 있다. 그러면서 모두가 법정에서 '공소장 일본주의(公訴狀一本主義) 위배'를 주장한다. 거물 피고인들이 빼놓지 않고 주장하고 있는 ‘공소장 일본주의’는 무엇일까.

양 전 대법원장 등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재판이 시작되면서 공소장 일본주의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이 문제가 해석의 영역이어서 끝없는 논란을 낳을 수 밖에 없다"고도 한다.

◇死文化됐던 규정,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공소장 일본주의는 검사가 기소할 때 공소장에 공소 사실과 관련 없는 다른 서류나 증거물을 제출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형사소송규칙 118조 2항은 "공소장에는 법원에 예단이 생기게 할 수 있는 서류 기타 물건을 첨부하거나 그 내용을 인용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양 전 대법원장과 임 전 차장, 유 전 연구관 등은 "검찰이 공소장에 혐의 사실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설명을 상세하게 써놔 재판부가 유죄 심증을 갖도록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재판 속도가 상대적으로 빠른 임 전 차장 측 변호인은 "공소장을 읽다 보면 이미 유죄로 귀결이 된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성추행 의혹을 보도한 기자들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정봉주 전 의원 측은 재판에서 "공소장 내 범죄구성 요건을 다룬 부분 이전에 이 사건의 구체적 범죄 혐의와 관계 없는 내용이 담겼다"며 "정 전 의원이 자기의 잘못을 모두 인정한 것처럼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법조계에서는 이를 두고 긴 수사 기간 동안 혐의 사실이 새어나가 '여론재판'을 받은 상황에서, 공소장까지 유죄를 예단케 할 경우 불리한 재판이 진행될 수밖에 없어 절차적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법원장 출신 변호사는 "재판 초기 상황을 환기하기 위해 공소장 일본주의 위배를 지적하는 것 같다"면서 "최근 검찰의 공소장은 지나치게 장황하고 필요없는 부분이 있다는 지적을 받을만 하다"고 했다. 그러나 검사장 출신의 변호사는 "사안에 따라 동기나 배경을 쓰는 게 불가피한 사건도 있다"며 "공소장 일본주의의 한계를 일률적으로 정하기가 힘든데 거물급 피고인들이 이 같은 지점을 파고드는 것 같다"고 했다.

공소장 일본주의 규정은 1982년 형사소송규칙이 제정될 때부터 있었다. 하지만 검찰이 재판에 앞서 수사기록 등을 미리 법원에 제출하면서 사실상 사문화됐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대법원이 ‘공판중심주의’를 강조하면서 조금씩 변화가 왔다. 이후 검찰이 공소장 외 다른 수사기록이나 증거물을 제출하는 것을 자제하면서 서서히 공소장 일본주의가 지켜지는 듯 했다.

그러나 이후 또 다시 공소장 일본주의를 흔드는 변칙적인 관행이 생겨났다. 검찰이 증거물 등은 제출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공소장에 '범죄사실'과 관련 없는 부가적인 사실을 넣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두고 공소장 일본주의 위배인지에 대한 논란이 이어졌다.

◇유죄 예단케 하는 공소장은 재판에서 'NO'
실제로 재판에서 검찰이 이 규정을 위배했다고 판단해 공소기각 판결을 내린 경우도 있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경우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 혐의로도 기소됐다. 1심 재판부는 "(검찰의) 공소사실만 보면 이 전 대통령에게 보고된 각종 보고서 내용 중 범행 동기에 부합하는 내용만 전체 공소사실의 절반에 이를 만큼 길게 기재돼 있다"며 "이 부분은 범죄사실의 구성요건과 무관하고, 법관에게 막연하게 유죄를 의심하게 하는 기재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재판부는 이 혐의에 대해 공소를 기각했다.

20대 총선 당시 같은 당 후보를 지지하는 발언을 한 혐의를 받았던 김생기 전 정읍시당의 사례도 있다. 법원은 "검찰이 공소사실 외에도 기타 사실과 증거의 내용 인용 부분을 기재했다"며 "증거 내용을 공소사실에 기재한 것은 법관에게 예단을 주기에 충분하고, 이는 공소장 일본주의를 정면으로 중대하게 위반한 것"이라고 했다. 검찰은 공소장을 정비해 김 전 시장을 재기소했고, 대법원은 2017년 김 전 시장에 대해 벌금 200만원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반면 내란음모·선동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이나 국정농단 사건으로 기소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도 "검찰이 공소장 일본주의를 위배했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배경 설명 필요하다" vs. "사실만 적시해야"
공소장 일본주의의 한계에 대해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심리한 적도 있다. 2009년 문국현 전 창조한국당 대표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상고심에서다. 당시 문 전 대표는 검찰이 공소장에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주고받은 이메일 내용을 인용하거나 범행 배경을 써넣은 것이 공소장 일본주의 위배라는 주장을 폈다.

당시 전원합의체 재판장은 이용훈 대법원장이었고, 주심은 신영철 대법관이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기소된 양 전 대법원장도 대법관으로서 심리에 참여했다. 13명의 대법관 가운데 9명이 공소장 일본주의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다수 의견은 "정당 내부에서 은밀하게 벌어진 일이기에 범행 동기와 경위를 설명하기 위해 검사가 구체적인 사정을 적시할 수 있다"고 했다.

최근 자신의 혐의를 놓고 "검찰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다"고 지적한 양 전 대법원장은 당시 다수 의견에 대한 보충 의견을 냈다. 그는 "범죄의 동기나 경위, 범의와 공모관계, 범행의 배경이 되는 정황 등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구체적인 범죄 행위를 특정하고 그에 대한 형사 책임의 유무와 범위를 심리·판단하는 데 필요한 요소"라고 했다. 또 "사안이 복잡하거나 범행 수법이 교묘한 경우나 상황적 요소에 의해 범죄의 성립 여부가 좌우되는 미묘한 사안에서는 범행에 이르는 과정이나 그 배경 등 전후 상황에 관한 설명 없이 단순한 범죄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행위만을 기재해서는 공소 사실을 완성도 높게 특정할 수도 없다"고도 했다.

김영란·박시환·김지형·전수안 대법관은 반대 의견을 냈다. 이들은 "공소장에 기재되는 공소사실은 검사가 피고인의 처벌을 요구하며 구성요건으로 주장하는 사실의 기재에 불과하다"며 "그 주장사실의 기재는 범죄 구성요건에 직접 해당하는 사실들로만 간결하고 명확하게 기재돼야 한다"고 했다. 구성요건을 증명·확인하기 어려운 경우 추단할 수 있는 간접사실이나 공소사실을 특정하기 위해 필요한 주변 사실을 기재하더라도, 최소한도에 그쳐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