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는 11일 낙태죄 처벌 조항에 대한 위헌 청구 심판에서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임신 초기의 낙태까지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취지다. ‘헌법 불합치’ 결정이란 위헌성은 인정되지만 해당 법률을 당장 무효화할 경우 뒤따를 사회적 혼란 등을 피하기 위해 법률을 고칠 여유 등을 두고 효력을 인정하는 결정이다.

헌재는 "형법 제269조 1항, 제270조 1항 가운데 의사가 임신한 여성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아 낙태하는 경우에 처벌하는 조항은 모두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 법 조항들은 2020년 12월 31일까지를 시한으로, 법을 개정할 때까지 현행 법이 적용된다고 했다.

이번 사건은 산부인과 의사 정모씨가 "낙태죄는 임산부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해 위헌"이라며 낸 헌법소원 낸 것이다. 심판 대상 조항은 '자기낙태죄'로 불리는 형법 269조와 '동의낙태죄'인 형법 270조였다. 형법 269조는 임신한 여성이 낙태한 경우 1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돼 있고, 형법 270조는 의사 등이 임신한 여성의 동의를 받아 낙태한 경우 2년 이하의 징역으로 처벌하도록 하고 있다.

이날 심판에서 헌재는 재판관 4명이 헌법 불합치, 3명은 단순 위헌, 2명은 합헌 의견을 각각 냈다. 결국 헌법 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헌재는 "현재 낙태죄 조항은 모자보건법에서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경제적, 사회적인 이유로 낙태를 하면 광범위하고 예외없이 처벌하고 있다"며 "이는 태아 생명을 보호한다는 입법목적 달성을 위해 임산부의 자기결정권을 최소한도를 넘어 침해하고 있다"고 했다.

그려먼서 "자기낙태죄 조항으로 인해 낙태에 관한 상담이나 교육이 불가능하고, 충분한 정보를 제공할 수도 없다"며 "수술과정에서 의료사고나 후유증이 발생해도 법적 규제가 어렵고, (당사자가) 비싼 수술비를 감당해야 한다"고 했다. 또 "자기낙태죄 조항은 상대 남성이 복수나 괴롭힘의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유남석 헌법재판소장 등 헌법재판관들이 11일 낙태죄 헌법소원 사건 등에 대한 결정을 선고하기 위해 대심판정에 착석해 있다.

산부인과 학계에 따르면 현 시점에서 태아가 독자생존할 수 있는 시점은 임신 여성의 마지막 생리기간의 첫 날부터 22주 내외부터다. 헌재는 "태아가 모체를 떠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점에 도달하기 전이면서, 동시에 임신 유지와 출산 여부에 관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보장되는 시기까지의 낙태에 대해서는 국가가 생명보호의 수단과 정도를 달리 정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했다. 임신 초기 단계에서는 태아의 생명권보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무게를 둬야한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헌재는 "모자보건법상의 (낙태) 정당화 사유에는 다양하고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사유에 의한 낙태갈등 상황이 전혀 포섭되지 않는다"며 "자기낙태죄 조항으로 인해 임신한 여성은 신체적·심리적 부담과 출산 과정에 수반되는 신체적 고통·위험을 감내하도록 강제당하고, 광범위한 사회적·경제적 고통까지도 겪을 것을 강제당하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헌재는 "자기결정권에 과도한 침해가 있는 것이지 형사처벌하는 것 자체가 헌법에 위배된다고 볼 수 없으므로 입법공백기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하고 오는 2020년 12월 31일 입법 전까지 (기존 법을) 계속 적용한다"고 했다.

반면 조용호·이종석 헌법재판관은 "낙태죄 규정으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어느 정도 제한되지만 그 제한의 정도가 낙태죄 규정을 통해 달성하려는 태아의 생명권 보호라는 중대한 공익에 비해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다"며 합헌 의견을 냈다.

정씨는 2013년부터 2015년까지 69차례에 걸쳐 낙태 수술을 한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다가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신청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지난 2017년 헌법소원을 냈다. 헌재는 동의낙태죄 위헌 여부를 심사하기 위해서는 자기낙태죄 조항에 대해서도 심사해야 한다며 두 조항 모두를 심판 대상으로 삼아 심리를 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