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구도심 영경방(융칭팡·永慶坊)은 트렌디한 카페·음식점·패션숍이 들어선 젊음의 거리. 김구가 1922년부터 4년간 살았던 '영경방 10호'가 여기 있다. 지난 2월 27일, 신톈디(新天地)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에서 걸으니 5분쯤 걸렸다. 옛 흔적은 없었다. '10호'엔 미국 햄버거 체인 '쉐이크쉑 버거'가 들어섰다.

김구가 이곳에 살던 때 임시정부는 거의 무정부 상태였다. 상하이 독립운동가들은 러시아 볼셰비키 정부에 희망을 걸었다.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한국 대표단 52명이 몰려갔다. 김규식과 여운형이 공동 단장을 맡았다. 김규식은 대회 연설에서 "극동의 피압박 인민과 혁명 조직은 함께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만세!"라고 외쳤다. 레닌은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 200만루블을 주기로 하고 이동휘가 파견한 한형권에게 먼저 40만루블을 건넸다. 이동휘의 비서장 김립은 중간에서 자금을 빼돌렸다. 김구는 사형을 지시했다. 김립은 탄알 일곱 발을 맞고 사망했다.

김구, 1921년 가족과 함께 - 1921년 무렵 김구(왼쪽) 가족. 큰아들 인(가운데), 부인 최준례. 김구가 아내와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어려웠던 임정 상황을 회고한다. "임시정부 세운 지 3, 4년이 지나면서 열렬했던 독립운동자들이 하나둘씩 왜놈에게 투항하거나 귀국했다. 한때 천여 명에 이르던 독립운동자들이 점점 줄어들어 수십 명에 불과하니, 최고 기관인 임시정부의 형편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김구는 이승만이 상하이에 부임했던 때를 가장 활발히 활동했던 시기로 회고했다. "이 대통령이 취임 시무할 때에는 중국 인사는 물론이고 눈 푸르고 코 높은 서양 친구들도 더러 임시정부를 찾아왔다. 이제 임시정부에 서양인이라고는 프랑스 경찰이 왜놈을 대동하고 사람을 잡으러 오거나 세금 독촉으로 오는 이 외에는 없다."

이승만이 상하이를 떠난 때는 1921년. 정파 간 난맥상을 보이는 임정에 머물러서는 일을 하기 어렵다고 여겼다. 마침 새로 취임한 미 공화당 하딩 대통령이 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에 제안해 워싱턴회의(태평양군축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군축회의는 1921년 11월 12일 개막해 이듬해 2월 6일 끝났다. 개최 장소는 백악관 인근 현재 애국여성회(DAR·Daughters of the American Revolution) 건물. 이승만은 서재필·정한경 등과 한국 대표단을 꾸렸다. 하지만 미국은 참석을 허가하지 않았다. 일본이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을 것 등의 이유였다.

이승만과 워싱턴회의 한국대표단 - 1921년 11월 워싱턴회의 한국대표단. 왼쪽 아래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승만 서재필 정한경, 미국인 법률고문 돌프, 비서 메이본.

상하이에선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하자는 목소리가 커졌다. 1923년 1월 3일 국민대표회의를 열어 임시정부 문제를 논의했다. 정부 조직을 개편하자는 '개조파'와 정부를 아예 새로 만들자는 '창조파'가 대립했다. 김구는 국민대표회의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6월 6일 임시정부 내무총장에 취임한 김구는 "대표회 자체의 즉각 해산을 명한다"는 '내무부령 1호'를 공포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에 "공산당과 혼잡 마시오"라고 전보를 쳤다. '태평양잡지' 속간호(1923년 3월 통권 31호)를 내고 '국민대표회의'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공산주의 이론을 비판했다. "장차 저마다 일 아니 하고 얻어먹으려는 자가 나라 안에 가득할 것"이라고 했다. 이승만은 공산주의에 대해 "사상으로는 매우 고상하나 인류의 보통 관념으로는 가장 어리석은 물건"('태평양잡지' 1925년 7월호)이라고 했다. 김구는 공산주의자를 조선시대 사대주의자 같다고 비판했다. "정자와 주자가 방귀를 뀌어도 향기롭다고 하던 자들을 비웃던 그 입과 혀로 레닌의 방귀는 단물이라도 핥듯 하니, 청년들이여 좀 정신을 차릴지어다."('백범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