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이지 호르몬|랜디 허터 엡스타인 지음|양병찬 옮김|동녘|452쪽|1만9800원

1984년 봄, 스무 살 청년 조이 로드리게스가 비행기 좌석에서 일어나려다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 넘어졌고, 균형을 못 잡아 비틀거리며 걸었다. 언어장애 증상이 나타나 미세한 추가 혓바닥을 짓누르는 것처럼 더듬더듬 말했다. 진단 결과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CJD). 뇌에 스펀지처럼 구멍이 숭숭 나며 신속히 치매가 진행되는 희귀한 뇌 질환이다. 6개월 후 조이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인(死因)은 CJD가 분명했고, CJD는 오염된 성장호르몬과 관련된 것으로 판명됐다. 조이는 10대에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아 왔다.

196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성장호르몬 주사는 자녀의 키가 자라지 않을까 봐 노심초사하는 부모들에게 구세주였다. 당시엔 죽은 사람의 뇌하수체에서 추출한 '사람 성장호르몬'이 어린이들에게 주입됐다. 일부 부모들은 뇌하수체 수집에 나서기도 했다. 조이의 죽음 이후 비슷한 사례가 여기저기서 불거졌다. 시신에 숨어 있던 병원체에 성장 호르몬이 감염된 것이다. 미국 FDA는 사람 성장호르몬 치료를 금지하고, 제넨텍에서 개발한 합성 버전 호르몬을 승인했다.

미국 의사이자 작가가 쓴 이 책은 일반 독자를 위한 호르몬 연구사(史)다. '호르몬'이라는 용어는 '흥분시키다', 또는 '자극하다'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 '호르마오'에서 유래했다. 1905년 생리학자 어니스트 스탈링이 최초로 사용했다. 호르몬은 원격기관을 겨냥하는 분비샘에서 분비되고, 혈액을 경유해 이동하며, 신체의 유지·관리에 매우 중요하고, 생존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저자는 호르몬이 젊음과 건강에 대한 인간의 욕망, 그리고 상업주의와 결부되면서 어떻게 남용되고 오용되는지를 날카롭게 짚어낸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배운 호르몬의 역사를 안내자로 삼아, 약물과 정보에 대한 안목 있는 소비자가 될 것이다."(393쪽)

뇌하수체와 갑상샘을 나타낸 일러스트. 의사이자 작가인 엡스타인은 "천연물질인 호르몬도 오·남용하면 탈이 나기 마련"이라고 말한다.

회춘에 대한 욕망과 상업주의가 결합된 대표적인 예가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 마케팅이다. 주사제로만 나오던 테스토스테론이 젤 형태로 출시된 2000년과 2011년 사이 테스토스테론을 사용하는 미국 남성의 수가 네 배로 증가하며 20억달러 규모의 시장이 형성됐다. 구매자들은 TV 광고가 약속한 것처럼 '성적 충동에 민감한 날씬한 자아'를 얻기 위해 테스토스테론에 의지했다. '로티(Low-T) 증후군', 즉 '저(低)테스토스테론증'이란 단어가 유행하면서 '로티'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매뉴얼이 등장했는데, 이걸 만든 세인트루이스대학교 내분비·노인의학과장 존 몰리 박사는 "변기에 앉아 두루마리 화장지에 갈겨쓰며 20분 만에 만들어낸 쓰레기 같은 매뉴얼"이었다고 실토했다. 미 FDA는 노화와 관련된 저테스토스테론증을 질병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저자는 "질병이 존재하지 않으니 치료법이 존재할 리 만무하다"고 지적한다.

출산할 때 자궁 수축을 촉진해 '모성 호르몬'이라고 불리는 옥시토신은 '사랑과 신뢰의 호르몬'이라고도 알려져 높은 시장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쏟아져 나온 3500건의 옥시토신 행동 연구에서 옥시토신은 신뢰뿐 아니라 불신, 사랑뿐 아니라 질투, 공감만 아니라 인종차별과도 관련된 것으로 밝혀졌다. 어떤 연구에 따르면 옥시토신은 '좋은 감정'만 선별적으로 북돋우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느낀 감정'을 여과 없이 증폭시킨다. 저자는 옥시토신 열풍의 허점을 꼬집으면서 "'호르몬이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확실한 증거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을 뿐"이라고 경고한다.

이 밖에 호르몬 연구를 위해 뇌종양 환자의 뇌하수체를 수집한 20세기 초 의사 하비 쿠싱의 일화, 정관을 묶으면 남성호르몬을 자극해 회춘한다고 믿었던 1920년대 정관수술 열풍, 남녀 생식기를 모두 가지고 태어난 자녀들에 대한 60년대 부모들의 무분별한 성호르몬 치료 등을 비판적으로 소개한다.

표지와 제목은 발랄하지만 내용은 전문적이고 진지하다. 주제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소설의 한 장면처럼 소개하며 독자를 유혹하지만, 읽기 만만한 책은 결코 아니다. 원제 Arou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