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0일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손자 정모(30)씨는 영국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후 행방은 불분명. 현재 그는 법이 마약으로 규정하고 있는 '액상 대마' 등을 흡입한 혐의를 받고 있다. 정씨가 출국한 날은 그의 대마 공급자 이모(27)씨가 경찰에 긴급 체포되기 일주일 전이다.

서울 강북의 유명 초고층 아파트에 살았던 SK그룹의 장손 최모(32)씨는 경찰 체포 하루 전날인 지난달 30일과 31일 자신의 집에서 대마 0.5g을 피운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 조사를 앞에 두고도 대마에 손댈 정도로 중독 증상이 심각했던 것이다. 그는 지난해에만 대마 45g을 사들여 집에서 피운 혐의를 받고 있다.

마약투약 혐의를 받고 있는 남양유업 창업주의 외손녀인 황모씨가 4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경기남부지방경찰청으로 압송되고 있다.

아이돌 그룹 멤버의 여자 친구로도 유명했던 남양그룹의 외손녀 황모(31)씨는 2015년 마약 필로폰 투약 혐의를 받았을 때 제대로 조사를 받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경찰이 다시 수사를 시작했다. 뉴스 속 영상에서 황씨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말을 한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등장하는 '재벌가의 마약 게이트'. 그들은 왜 마약에 쉽게 빠지는 것일까.

보딩스쿨 마약 파티

마약 혐의를 받거나 받아온 대부분 재벌 3세들의 학력은 미국 중·고교 보딩스쿨(기숙학교)을 거쳐 대학에 진학한다. 이들 대부분이 보딩스쿨 시절에 마약을 접한 후 귀국해서도 그 '맛'을 잊지 못해 중독이 된다는 것이다. 필로폰 투약 혐의를 받고 있는 황씨도 미국 고등학교 유학 시절 마약을 처음 접했다고 지인들은 말한다. 이씨와 정씨가 피운 대마의 경우엔 캐나다와 미국 일부 주(州)에서는 합법이다.

이들에게 마약을 공급해 온 이씨도 재력가 집안의 해외 유학파 출신이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유학 중 정씨와 최씨를 알게 됐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벌가와 친분이 있는 30대 A씨는 "보통 보딩스쿨에서 파티 등을 통해 쉽게 대마를 접한다"며 "미국 내 일부 합법인 주가 있다고 해도 대마는 '입문용 마약'이다. 일단 시작하고 나면 강도가 높은 약물(코카인, 헤로인 등)을 찾거나 판매상들에게 제안을 받게 돼 위험하다"고 말했다.

이들이 주로 흡입한 '액상 대마'는 대마의 환각 성분을 농축한 것이다. 환각성이 일반 대마초보다 40배 이상 강하다. '대마 쿠키'도 환각성이 대마초에 비해 40배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황씨가 투약한 혐의를 받고 있는 필로폰은 환각, 정신분열 등의 만성 중독을 일으키는 마약이다.

창업자 정신 실종

"창업자나 2세까지는 현장에서 돌멩이도 나르고, 직원들과 같이 고생하면서 사업을 일구기 때문에 현실 감각이 있어요. 그런데 3세부터는 해외 생활을 하다 귀국해 바로 임원을 달기 때문에 그들만의 리그에 갇히는 경우가 많아요. 이럴 경우 마약 등에 대한 죄의식이 부족하고, 부모님이 어지간한 문제는 해결해 줄 것이라고도 생각해요."

40년 가까이 재계에 몸담은 B씨는 3세로 내려갈수록 '창업자 정신'이 실종됐다고 말했다. 최근 등장하는 3세들의 문제가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자라난 부유층 자제들이 쾌락의 마지막 단계로 마약을 탐닉한다는 분석도 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재벌가 자제들은 보통 사람들과 달리 대부분이 충족된 상태이기 때문에 더 자극적이고 색다른 것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다"고 했다.

강하고 비싼 담배

이번에 적발된 '액상 대마'의 경우엔 유럽에서 재배된 최고급 대마로 만들어 1g당 15만원 정도다. '고농도 대마 쿠키'의 경우에는 1g당 가격이 금값의 3배 수준에 달한다. 재력 없이는 즐기기 어려운 강하고 비싼 담배, 그래서 '그들만의 마약'이라고도 불린다. 경찰 관계자는 "대마 액상은 '진액(엑기스)'으로 특유의 쑥 냄새는 덜한 반면, 환각 효과는 더 강력하다고 알려져 있다"며 "대마잎을 갈아야 하는 '그라인더'나 담배 종이 등이 필요 없어 훨씬 간편하기도 하다"고 말했다.

국내 마약의 유통 경로는 소셜미디어(트위터 등)와 보안성 강한 메신저 프로그램(텔레그램)이 주로 활용된다. 지난 2일 트위터에서 '액상 대마'로 검색하니 '국내 최대 떨(대마초) 거래소'라는 판매 광고가 검색됐고, 같은 글 안에 텔레그램 아이디가 적혀 있었다. 이를 통해 연락하라는 의미다. 이번에 적발된 정씨와 최씨도 비슷한 방식을 이용했다고 한다. 황씨는 강남 클럽 내 유통망을 통해 마약을 거래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