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보수당 내부에서 사퇴 압박을 받는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26일(현지 시각) 런던 다우닝가 총리 관저에서 나오고 있다.

영국 브렉시트 정국을 이끌어온 테리사 메이(62) 총리의 사퇴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유럽연합(EU) 탈퇴 협상이란 난제 앞에서 갈가리 찢긴 국론 통합에 사실상 실패, 3년 만에 불명예 퇴진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로이터통신과 BBC, 텔레그래프 등은 27일 저녁 7시(현지 시각) 의회가 브렉시트의 다양한 선택지에 대한 '끝장 투표'를 실시하기에 앞서, 메이 총리가 여당인 보수당 의원들과 만나 총리직 사임 날짜를 밝힐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당 지도부가 메이와 EU 간 브렉시트 합의안에 대한 3차 투표 때 표를 몰아줘 통과시키는 대가로 총리직을 사퇴하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메이 총리도 이 '빅딜'에 공감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메이의 합의안이 두 번이나 부결된 건 여당 내분 탓이 크다. 브렉시트 충격파를 최소화하기 위해 영국을 당분간 EU 관세동맹에 남겨둔다는 합의안에 보수당 강경파는 "무기한 EU에 종속될 수 있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최근 런던에서 100만명이 2차 국민투표를 요구하며 시위하는 등 여론이 심상치 않자, 보수당 내부에서 '미흡하나마 메이의 안을 수용해 브렉시트부터 빨리 해놓고, 메이가 물러나면 새 판에서 다시 EU를 압박해보자'는 전략이 그려진 것으로 알려졌다.

뉴욕타임스·폴리티코·가디언 등 영미 언론들은 이런 메이 총리의 운명이 처음부터 예견돼 있었다고 분석하며, '유리 절벽(glass cliff)'이란 개념을 들고 있다. 유리 절벽은 기업이나 정치 조직에서 기존 남성 리더십 아래 실적 악화나 심각한 윤리적 문제가 생길 경우, 쇄신을 위해 소수자인 여성을 리더로 파격 발탁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학문 이론이다. 여성 역시 통상적인 상황에선 고위직을 맡기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독배(毒杯)를 마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물려받은 기반이 좋지 않은 만큼 성공률도 낮다.

영 엑스터대(2005년)와 미 유타대(2013년), 퀸즐랜드대(2015년) 연구 등에 따르면 주요 대기업이 주가 하락이나 스캔들 등 경영 부진기에 친화력이 높은 여성을 최고경영자로 내세우는 비율이 높고, 이런 여성 CEO의 재직 기간은 남성보다 평균 2년 짧으며, 여성 리더의 실패 후 후임은 남성이 다시 맡는 패턴이 나타났다.

언론과 사회학자들은 메이 총리를 '유리 절벽의 핵심 케이스' '유리 절벽의 교과서'로 꼽는다. 메이 총리는 2016년 당시 총리 후보군과는 거리가 먼 보수당 비주류 출신 내무장관이었다. 브렉시트 찬성론자도 아니었다.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가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에 책임지고 물러나자, 보리스 존슨 전 런던시장 등 보수당 남성 유력 인사 5명 정도가 거론됐지만 브렉시트란 '진흙탕'에서 일제히 발을 뺐다. 그리고 무명에 가깝던 메이를 포함한 여성 의원 2명이 "위기에 처한 당을 구하겠다"며 결선을 벌였다.

내성적인 메이 총리는 당에 지지 기반이 깊지 않았고, 2017년 총선 패배와 2018년 말 브렉시트 협상 교착을 빌미로 여당 핵심에 계속 휘둘렸다. 메이가 들고온 EU와의 협상안이나 다른 대안은 의회에서 판판이 부결된 반면, 지난해 말 유일하게 '메이 재신임안'만 통과됐다. 어떤 식으로든 브렉시트가 완료되기 전 전면에 나서겠다는 정치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년 총리 1순위'인 존슨이 26일 "브렉시트(이후) 2차 국면에선 분명한 변화가 약속돼야 한다"며 총리 교체를 주장했고, 캐머런 전 총리의 정계 복귀설도 나오는 등 향후 차기 총리 경쟁전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유리 절벽(glass cliff)

기업 등 조직이 위기 상황에 처하거나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일을 진행하려고 할 때, 일부러 여성을 고위직으로 임명해 잠재적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성차별적 사회현상. 조직 내 여성의 사회 참여나 승진이 가로막히는 '유리 천장'과 연관된 개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