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가 KBS TV에서 "이승만은 미국 괴뢰"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고 강의한 내용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선동적 표현도 문제지만 이승만에 관한 사실 자체가 허위라는 지적이다. 80년대 베스트셀러 '해방 전후사의 인식' 필진으로 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을 지낸 김명섭(56·연세대) 교수는 "역사의 일면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반(反)이승만적 관념에 갇혀서 과거를 해석하는 '역사 정치'의 폐해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20일 오후 김 교수를 연구실에서 만났다.

김명섭 교수는 "도올 KBS 강의는 진실을 추구한다며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용옥 교수가 TV에서 이승만과 김일성은 미·소가 한국을 분할 통치하기 위해 데려온 괴뢰라고 했다.

"스탈린 '대원수' 아래서 소련 군복을 입었던 김일성과 이승만을 동급으로 비교한 것부터가 잘못됐다. 이승만은 해방 직후 하지 미(美) 군정 사령관과 대립하며 적대 관계에 있었다. 미 군정은 이승만이 아니라 김규식·여운형의 좌우 합작을 지원했다. 그런 이승만을 미국 괴뢰라고 하는 건 사실과 전혀 다른 선동이다."

-이승만은 4·19로 쫓겨났기 때문에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고도 했다.

"대한제국 수립 직전 독립협회 당시부터 활약한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지낸 분이다. 이승만의 외교 활동 덕분에 태평양전쟁 당시 재미 한인들은 일본인처럼 강제 수용되지 않았다. 한국이 2차 대전 참전국이 아니면서 1943년 카이로회담에서 독립을 보장받는 데도 기여했다. 6·25전쟁에서 나라를 지켰고, 한·미 동맹이라는 안전판을 만들어 놓았다. 이런 이승만의 일부 오점만 문제 삼으면 어떡하나. 1965년 이승만 장례식 때 정동에서 서울시청 광장을 거쳐 동작동 국립묘지까지 이어졌던 백만인파는 우매한 민중인가."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인 신탁통치에 대해 "찬탁은 합리적 판단, 반탁은 꼴통"이라고 했다.

"일제가 패망했는데 5년간 더 신탁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안(案)에 대해 민중은 분노했다. 백범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앞장섰다. 공산당 등 좌파는 머뭇거리다 1946년 초 스탈린 지시로 찬탁으로 돌아섰다. 요즘 학계에 찬탁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다. 반탁은 당시 국민 여론에 따른 대세였다. 만약 좌우 모두 찬탁했다면? 탁치국 중 하나로 거론되던 중국의 공산화 이후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됐을 것이다."

-도올은 당시 동아일보 사장인 송진우가 미 군정청 설명을 듣고 백범을 찾아가 찬탁을 설득했다고 말했다.

"민족 지도자였던 송진우까지 끌어들여 반탁을 비판하는데 사실과 다르다. 그는 임정봉대론자였다. 3상 회의 결정문을 읽어보지 않은 임정 요인들의 반탁운동이 미군정에 대한 불복종운동으로까지 확대되는 것에 반대했지만 백범에게 찬탁을 설득했던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한반도를 분할 점령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한국을 빨리 독립시키는 게 좋다고 했다는 주장도 했다.

"소련은 38선 이북뿐 아니라 한반도 전체에 친소(親蘇) 정권이 들어서길 원했다. 스탈린은 1945년 9월 이미 북한 내 단독 정권 수립을 지시했다. 소련군이 진주한 북한에선 1945년 10월 이후부터 공산화가 급속히 진행됐다.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공개된 소련 비밀문서들을 통해 밝혀진 사실이다. 소련군이 진주한 동유럽에서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스탈린이 통일이나 독립을 원했다면 그것은 동유럽처럼 공산화된 통일이나 독립이었을 뿐이다."

-도올의 현대사관(觀)은 80년대 민중사관과 이승만을 모욕한 다큐 백년전쟁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사실보다 자신이 '믿고 싶어 하는 진실'을 앞세우는 역사관이 문제다. 이상형을 이념적으로 설정해 놓고 그 방향으로 과거가 이루어졌어야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의 정치적 신조에 갇혀서 과거를 해석하면 위험한 '역사정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