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 아카마신궁 앞 부두에는 조선통신사 기념비가 서 있다. 정확하게는 조선통신사 상륙엄류지지(朝鮮通信使上陸淹留之地) 기념비다. ‘엄류(淹留)’는 머물렀다는 뜻이다. 2001년 한일의원연맹이 세웠다. 임진왜란 종전 후 조·일 양국은 각각 통신사와 왜관을 통해 교류를 재개했다.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 이어진 통신사는 한성을 떠나 부산~쓰시마~시모노세키~오사카를 거쳐 에도(江戶·현 도쿄)를 왕래했다. 나가사키 인공섬 데지마(出島)를 통해 근대 세계를 흡수하던 일본과 성리학적 세계관을 심화시키던 조선, 그 지성(知性)과 지도층이 충돌한 사건이었다. 틀림없이 많은 일을 겪었을 것이다. 많은 것을 느꼈음도 틀림없다.

조선 중화와 쇄국

병자호란 끝 날인 1637년 2월 24일 잠실 삼전도에서 조선 국왕 인조가 후금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했다. 치욕이었다. 실록은 '항복'이 아니라 '하성(下城)', '산성에서 내려왔다'고만 기록했다. 부도덕한 행위이기도 했다. 은혜로 치면 아버지와 같은(恩猶父子·1623년 3월 14일 '인조실록') 명을 배신하고 오랑캐 청에 군신 관계를 맹세했으니까. 조선 지배 질서를 유지하던 성리학적 세계가 한나절 만에 파괴됐다는 뜻이다. '아들은 아비를 알지 못하고 신하는 임금을 알지 못하여 짐승 무리가 될(子焉而不知有父 臣焉而不知有君 而混爲禽獸之類)'(송시열, '기축봉사', 1649) 두려운 세상이 닥쳐버린 것이다. 사림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해결책은 복수였다.

하지만 사대해야 할 명은 망하고 없었다. 복수해야 할 오랑캐는 힘이 너무 강했다. 17세기 권력을 잡은 노론(老論)은 복수를 포기했다. 대신 '조선을 통해 중화가 부활했다'는 소중화(小中華) 혹은 조선중화(朝鮮中華)를 들고 나왔다. 주야장천 입으로는 북벌을 외치지만 조선이 명을 계승했으니 굳이 복수할 이유가 없다는, 위대하고 고상한 정신 승리였다. 이후 조선 왕국 외교와 정치와 사회와 경제와 문화는 쇄국과 사대(事大)와 성리학 획일주의로 움직였다. 통신사를 통한 대일 외교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정보원, 데지마 풍설서

1641년 에도막부가 네덜란드에 독점무역권을 허용할 때 조건이 있었다. 나가사키 인공 섬 데지마에만 체류할 것, 그리고 정기적으로 에도로 와서 막부에 세계정세를 보고할 것. 네덜란드 상인들은 데지마에 앞서 히라도에 상관을 연 1633년부터 1850년까지 166차례 에도를 방문했다.(정하미, '조선통신사의 교토 체재와 조선인가도', 일본어문학 68집, 2015)그때마다 네덜란드 상관은 도쿠가와 쇼군과 수뇌부에 '풍설서(風說書)'를 전달했다. 풍설서는 네덜란드 상인들이 전 세계에서 수집한 국제 정세 보고서였다. 1666년부터는 일본어 번역본이 올라갔다. 1840년 아편전쟁 후에는 더 세밀한 '별단풍설서'가 올라갔다. 에도막부는 이를 통해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의 등장을 알았고 페리 제독이 몰고 온 미국 군함의 이름과 규모를 미리 알았다. 듣도 보도 못한 정보로 무장한 일본 외교관과 지성 앞에서 조선통신사는 무기력했고, 오만했다.

임진왜란 후 일본과 국교를 회복한 조선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보냈다(조선통신사사행도·국립중앙박물관). 성리학적세계관과 근대 세계관이 충돌하는 사건이었다. 일본은 조선의 실체를 파악하고 1811년 교류를 단절했다. 왼쪽은 시모노세키에 있는 조선통신사 상륙엄류지지 기념비, 위 지도는 통신사 이동 경로.

"왜 명나라 옷을 입었는가"

1711년 여덟 번째 통신사가 일본에 도착했다. 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德川家宣) 취임 축하 사절이다. 일본 외교 파트너는 유학자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였다. 11월 5일 에도에서 조선 통신사들과 하쿠세키가 대화를 했다. 조선 정사 조태억이 '문재(文才)가 샘솟는다(泉湧)'고 격찬한 학자였다.

조태억이 말했다. "천하가 오랑캐를 따르지만 우리나라만은 대명의 제도를 고치지 않았다. 우리가 동주다(我獨爲東周)." 하쿠세키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왜 (은·주가 아닌) 명나라 옷을 입고 있는가. 그나마 (오랑캐) 청나라가 봐줘서 그 정도 아니겠는가?"('신정백석전집', '강관필담·江關筆談') 웃기지도 않다는 조롱이었다. 그가 말했다. "대서양(大西洋)과 구라파의 이탈리아, 네덜란드 사람들을 직접 보았고 지금 공(公)들과 한집에 있으니 기이하다." 부사 임수간이 아는 체를 했다. "대서양은 서역 '나라' 이름이다. 구라파와 이탈리아는 어느 곳에 있는가?" 하쿠세키가 반문했다. "귀국에는 만국전도가 없는가?"(임수간, '동사일기', '강관필담', 1712) '강관필담'은 조선·일본 양측에 있는 기록이다.

8년 뒤 1719년 사행에서는 쓰시마의 지한파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가 제술관 신유한을 따로 불러 말했다. "우리는 일본(日本)이다. 왜적(倭賊)이니 오랑캐 추장(蠻酋·만추)이라 멸시하지 말라."(신유한, '해유록', 1719) 호슈는 "예의 없는 나라는 없다. 조선은 시종 군신의 예를 폐하지 않았던 까닭에 중국이 예의 바르다 칭찬할 뿐"이라고 했다.(김선희, '일본 유자의 자국의식과 조선', 한국실학연구 9권 9호, 2005)

12차례 사행 내내 통신사들은 이렇게 잽과 스트레이트와 어퍼컷을 얻어맞았다. 성리학과 중화를 얘기하면 일본 측 파트너는 근대 지식으로 맞받았다. 조선이 성리학에 세뇌돼 있을 때 일본 학계에서는 주자학, 양명학과 근대과학, 난가쿠(蘭學)가 백가쟁명(百家爭鳴)을 하고 있었다.

"공자를 죽인다" "교화가 필요"

일본은 임진왜란 때 끌고 간 조선 선비 강항을 통해 성리학을 받아들였다. 이후 일본 성리학은 급속도로 주자학을 벗어났다. 네덜란드라는 문을 통해 들어온 유럽 학문과 지식은 중화 제일의 주자(朱子)를 버리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데지마에 전시된 네덜란드-일본어 사전(1833년). 일본 통역사들과 네덜란드상관장 헨드릭 되프 공동 작품이다. 오른쪽은 1808년 지리학자 홋타 니스케(堀田仁助)가 제작한 지구본(시마네현립고대이즈모역사박물관). 데지마를 통해 습득한 유럽 학문 난가쿠(蘭學)는 일본 사회를 전방위적으로 변화시켰다.

주자학자인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1618~1682)는 '주자를 배워서 잘못된다면 주자 역시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文會筆錄·문회필록', 김선희 재인용) 안사이의 제자 아사미 게이사이(淺見絅齋)는 더 거칠었다. "다른 나라 군주 명을 받아 공자와 주자가 일본을 공격해온다면 내가 먼저 나서서 철포를 들고 공자와 주자의 목을 쳐 깨뜨리리라(以鐵炮擊破孔子朱子之首)."(淺見絅齋集, '淺見先生學談')

조선 통신사들은 그런 일본을 '교화가 필요한 오랑캐'라고 규정했다. 1763년 통신사 제술관 성대중은 "일본 학술은 긴긴 밤이라고 해야 옳으며 일본 문장은 소경"이라며 "책임은 오로지 우리나라 선비들에게 있다"고 했다.(성대중, '해사일기', 1764) 성대중이 제술관으로 갔던 1763년 11차 통신사는 그 세계관의 전쟁터였다.

"식견이 비루하다" 비난받은 통신사

1763년 7월 24일 영조는 시를 짓는 시험을 통해 사신을 골랐다. 선정된 통신사 정사 조엄과 부사 이인배, 종사관 김상익에게 영조는 '이릉송백(二陵松栢)'을 잊지 말라고 외우며 목이 메었다.(조엄, '해사일기' 8월 3일) 이릉송백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도굴한 성종과 중종릉을 뜻한다. 왕실을 유린했던 오랑캐를 뛰어난 문장으로 누르고 돌아오라는 당부다.

일본은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재위 1716~1751)의 교호개혁(享保改革)에 의해 난가쿠가 공식적으로 허용된 직후였다. 고학(古學)과 양명학(陽明學)과 국학(國學)과 서양 학문으로 겹겹이 갑옷을 두른 일본은 홑겹 주자학으로 무장한 조선 지식인들 훈계 대상이 아니었다. 중화 시스템을 교화하려는 조선 통신사에게 일본 학자들이 어퍼컷을 날렸다. '무력으로 안 되니 문사를 내세워 앞서려고 한다. 우리나라 학문이 어두운 틈을 타서 깃발을 드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이들이다.'(나카이 지쿠잔·中井竹山, '草茅危言·초모위언', 김선희 재인용) 시모노세키에서 유학자 다키 가쿠다이(瀧鶴臺·1709~1773)는 이렇게 조선 성리학자들을 '타일렀다'.

"우리 나가사키에 오는 외국 배가 120 ~130개국이다. 지구본을 보거나 '곤여전도(坤與全圖)'를 보거나 '명청회전(明淸會典)'과 '일통지(一統志)'를 봐도 실려 있지 않은 나라가 더 많다. 우주가 크고 나라가 많음이 이와 같다. 저마다 그 나라 도가 있어(其國各有其國之道) 나라가 다스려지고 백성이 편안해한다. 인도에는 바라문법과 불교 도(道)가, 서양에는 천주교, 회회교와 라마법이 있다. 모두 하늘을 대신해 나라가 다스려지고 백성이 편안한데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國治民安 又復何求)."(다키 가쿠다이, '장문계갑문사·長門癸甲問槎', 稟) "중국을 귀히 여기고 이적을 천시하니 식견이 비루하여 천지의 광대함을 알지 못한다(識見之陋 不知天地之大者)"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임채명, '장문계갑문사의 필담을 통해 본 조일 문사의 교류', 일본학연구 27집, 2009)

'이릉송백'을 되새기고 조선 중화의 위엄을 자랑하려던 통신사들은 참패하고 귀국했다. 예견된 참패였다. 12차 통신사 행사는 1811년 에도 대신 쓰시마에서 열렸다. 이후 일본은 통신사를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64년이 지난 1875년 철포로 무장한 군함 운요호를 강화도로 보냈다.

난가쿠 의사와 조선 의사

1748년 영조 24년 10차 통신사를 수행한 조선 의사 조숭수에게 오사카의 의사 다나카 쓰네요시(田中常悅)가 조언을 청했다. "우리나라에 개들 돌림병이 유행해 갑자기 미쳐 날뛰고 사람을 보면 번번이 물었다. 가르침을 베풀어주시라." 사람들이 질문을 담은 글을 돌려 읽고 조숭수가 답했다. "돼지 똥물을 쓰되 마신다(用猪糞水 呷之耳)"(다나카 쓰네요시·田中常悅, '和韓唱和附錄·화한창화부록', '의문7조', 김형태, '통신사 의원필담에 구현된 조일 의원의 성향 연구' 재인용)

6년 뒤 일본 의사 야마와키 도요(山脇東洋)가 사형수를 대상으로 해부를 실시하고 1759년 해부학 서적 '장지(藏志)'를 펴냈다. 4년 뒤 앞서 언급한 '이릉송백'의 1763년 통신사에 조선 의사 남두민이 수행했다. 1764년 1월 20일 오사카에서 일본 의사 기타야마 쇼(北山彰)가 남두민에게 물었다. "일 벌이기 좋아하는 의사가 사형수 배를 갈라 장부를 살펴보고 책 한 권을 지었다. '황제내경'에 적힌 것과 다르다고 했다. 소견은 어떠신지?"

잠시 후 남두민이 답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래된 법칙을 따르고 새로운 학설은 다시 구하지 않는다(不復求新說). 갈라서 아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는 짓이고 가르지 않고도 아는 것은 성인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니, 미혹되지 마시게(君勿惑)."(기타야마 쇼·北山彰, '雞壇嚶鳴·계단앵명', 김형태, '필담을 통한 조일 의원간 소통의 방식' 재인용)

각성 없는 통신사

1600년대 후반 일본은 4㎞마다 이정표가 서 있어 여행 거리를 즉시 알 수 있었고(데지마 주재 독일인 의사 캠퍼, '江戶參府旅行日記') 이미 1653년에 상수도가 완공돼 에도 시민은 수돗물을 마실 수 있었다.(오이시 마나부, '일본 근세도시 에도의 기능과 성격', 도시인문학연구 1호, 2009) 그 모습은 "금문(金文)이 찬란한 층루(層樓)와 보각(寶閣)은 또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신유한, 해유록, 1719) 그럼에도 신유한은 이렇게 평가했다. "번화 부귀(繁華富貴)가 잘못되어 일개 흙인형에게 입혀져 있구나." 남두민도, 신유한도 잘못은 없었다. 그 의사와 그 학자를 만든 성리학이 문제였다. 〈⑧성리학과 난가쿠(蘭學)·下〉에서 계속

〈글 싣는 순서〉 1. 1543년 무슨 일이 벌어졌나 2. 1543년 지구가 움직였다 3. 1543년 일본, 총을 손에 넣다 4. 1543년 조선, 서원을 열었다 5. 세종, 천재의 시대와 칠정산역법 6. 이와미은광과 조선인 김감불 7. 임진왜란과 로마로 간 소년들 8. 성리학과 난가쿠(蘭學) 9. 무본억말(務本抑末)과 조선 도공 10. 1852년 고종과 메이지 태어나다 11. 메이지유신과 대한제국 12. 기적의 대한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