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부터 비 오기를 기원하는 제사는 있었으나 없던 바람이 불기를 비는 의식은 없었다. 그러나 영남과 제주에서는 음력 2월 초하루면 풍신제(風神祭)를 열어 바람 신(神)인 '영등할매'가 순순한 바람을 몰고 오길 빌곤 했다. 영등할매가 딸을 데리고 오면 바람 살살 부는 맑은 날씨가, 며느리와 함께 오면 비바람과 함께 꽃샘추위가 닥친다고 했다. 우리 민족에게 바람은 그만큼 조심스러운 자연 현상이었다.

▶'바람피우다, 바람 들다, 바람 잡다, 바람 넣다….' 우리말에는 바람의 느낌이 대개 부정적이다. 유행가 가사도 바람이 불기보다는 멈춰달라는 쪽이다. 조용필은 "바람아 멈추어라/ 촛불을 지켜다오"라고 했고, 전영록은 "바람 불면 떠날 사람인데/ 바람아 멈추어다오"라고 했다. 그런데 미세 먼지 때문에 바람은 모든 국민이 간절히 바라는 자연 현상이 됐다.

▶예전 황사(黃砂) 때는 민감한 사람만 마스크를 쓰는 줄 알았는데 요즘 일주일째 코와 입을 덮고 다니다 보니 이런 풍경에 익숙해진다. 안 쓰고 버티면 이상할 정도다. 무슨 재난 종말을 그린 영화 장면 같기도 하다. 답답하다고 얼굴 내놓고 그냥 다니자니 연일 지면을 압도하는 미세 먼지 소식에 불안하다. 1950년대 런던에서 스모그로 1만명 넘게 죽었다. 그때 지금 같은 마스크를 썼다면 인명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지하철을 탄다고 안심할 수 없고 운전할 때도 마스크를 써야 한단다. 아주 작은 먼지는 피부까지 뚫고 들어간다니 어떻게 해도 피할 수 없다. 미세 먼지는 중국의 영향이 절반이나 되고 위성사진을 봐도 명백한데 정부는 물론 환경단체도 중국에 아무 말 못하고 있다. 게다가 중국은 지난 5년간 나름대로 노력해 대기 오염도를 3분의 1가량 줄였다고 한다. 우리 정부는 대책이라곤 없으니 국민은 바람 불기만 기다린다. 그런데 지구온난화 때문에 적도와 극지방의 기온 차가 줄면서 지구의 바람 자체가 약해졌다는 학설까지 신경 쓰인다.

▶귀주대첩에서 강감찬 군사들은 남동풍이 불어 화살에 힘이 실린 덕에 거란군을 쫓아냈다고 한다. 적벽(赤壁)에서 조조의 백만 대군은 바람을 타고온 불붙은 배에 당했다. 지금 필요한 게 그런 바람이다. 연날리기 대회나 윈드서핑 대회를 앞두고 바람을 기대하는 기풍제(祈風祭)를 올리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마침 오늘은 음력 2월 초하루, 영등할매 오시는 날이다. 딸·며느리 다 데려와 미세 먼지 날려버리라고 기풍제라도 올려야 할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