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조선총독부박물관에 소장된 조선시대 병기(兵器)류 유물 1610점을 공출(供出)했다는 사실이 75년 만에 밝혀졌다.

국립중앙박물관(관장 배기동)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를 해제·정리하는 과정에서 1944년 5월과 6월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작성한 150장 분량의 문서를 확인했다"며 "총독부박물관이 소장한 조선~대한제국의 옛 병기류 유물 중 함경북도 북선(北鮮)과학박물관과 은사기념 과학관에 각각 166점, 295점을 무상 양여(讓與)하고, 나머지 1610점은 금속 회수를 위해 처분한다는 내용"이라고 24일 밝혔다. 일제가 박물관 소장품까지 녹여 무기로 만든 사실이 처음 확인된 것이다.

◇박물관 소장 문화재까지 공출

1942년 9월 8일 일제는 전국에 금속 회수령을 발표했다. 태평양전쟁이 절정에 달하면서 생긴 군수품 조달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였다. 특히 미국산 쇠 부스러기(屑鐵·설철) 수입마저 단절되자 큰 타격을 입은 일제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쇠붙이란 쇠붙이는 죄다 끌어모았다. 동상이나 고층 건물의 쇠 난간, 철제 가로등을 비롯해 관공서와 학교의 쇠 울타리, 집에서 쓰는 가마솥·놋그릇·수저·촛대, 사찰의 범종까지 공출됐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일제가 민간·기업의 쇠붙이뿐 아니라 문화재인 조선총독부박물관 소장품까지 대량 공출했다는 사실이 처음 확인됐다. 조선총독부박물관은 1915년 개관 당시 조선군사령부와 육군 병기지창에서 이관된 조선시대 병기류를 다수 소장하고 있었다.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면서 대한제국 군대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압수한 무기들로 추정된다.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박물관 소장 병기류 무상 양여 및 처분’ 문서 첫 장. 1944년 5월 18일 날짜로 파란색 도장이 찍혀 있다.

문서에 따르면 공출된 유물은 모두 금속 무기류다. 도기·자기·목기 등 다른 재질의 유물은 없다. "같은 종류가 많고, 보관상 불편함이 있어 진열품으로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는 양여·처분한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목록을 보면 천보총(千步銃)은 전체 27점을 모두 양여·처분했고, 1점뿐인 고마루총도 처분했다.

'같은 종류가 많아 일부를 처분한다'는 명분과 달리 회선총(回旋銃), 정목화약통(丁木火藥桶), 군도(軍刀), 도보도(徒步刀), 개화포탄환(開花砲彈丸) 등 140여종이 모두 이름만 남고 사라졌다.

◇현재 유물 카드엔 '왜정 말기 금속 공출' 도장

국립중앙박물관이 현재 보관하고 있는 유물 카드에는 이 양여·처분된 유물에 대해 '왜정 말기 금속 공출(倭政末期 金屬供出)'이라는 파란색 도장이 찍혀 있다. 박진우 유물관리부장은 "1960년대 초반에 정리된 기록으로 일제가 조선 무기 유물 다수를 공출했다는 사실이 남아 있는 유물대장을 통해서 확인된다"고 했다.

총독부 문서 자료를 검토한 오영찬 이화여대 교수는 "금속류 비상 회수가 진행됐던 1944년 총독부가 박물관의 병기 유물을 공출했다는 건 소장품을 녹여 자신들의 무기를 만들었다는 뜻"이라며 "겉으로 드러나는 행정적 절차는 북선과학박물관과 은사기념 과학관의 요청에 의해 일부 양여하고 다수의 유물을 처분한 것으로 보이지만, 총독부박물관 소장품을 공출하기 위한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일부 유물을 두 박물관에 양여한 것일 뿐 실제 목적은 전쟁에 필요한 금속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박제광 건국대박물관 학예실장(조선시대 전쟁·무기사 전공)은 "조선시대 군사 유물은 지금도 남아 있는 수량이 그리 많지 않기에 이때 상당수의 군사 유물이 사라졌을 가능성이 있어 안타깝다"며 "목록에 등장하는 군사 유물의 명칭 등 추가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