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현지시간) 패션 거장(巨匠)’ 칼 라거펠트가 8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샤넬의 부흥을 이끈 라거펠트는 명품(럭셔리) 패션 디자인을 정립해온 인물이다
샤넬은 19일(현지 시각) 샤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칼 라거펠트가 프랑스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사인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최근 몇 주 건강상태가 악화한 것으로 전해졌다
샤넬은 19일(현지 시각) 샤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칼 라거펠트가 프랑스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최근 몇 주 건강상태가 악화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지난 1월 파리에서 열린 샤넬 오뜨 꾸뛰르(고급 맞춤복) 패션쇼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당시 샤넬은 "칼 라거펠트가 심신이 지쳤다"는 긴급 성명을 발표했다
19일(현지 시각) 이날 샤넬은 인스타그램 공식 계정에 "칼 라거펠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죽음을 발표하게 된 건 깊은 슬픔"이라면서 "뛰어난 창의력을 지닌 칼 라거펠트는 가브리엘 샤넬이 만든 브랜드 코드를 재창조해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칼 라거펠트)는 ‘내 일은 그녀(가브리엘 샤넬)이 한 일이 아니라 그녀가 했을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곤 했다"며 "그는 끝없는 상상력으로 사진과 단편 영화 등 많은 예술 세계를 탐험했다. 샤넬은 1987년부터 그의 재능 덕을 많이 봤다"고 덧붙였다
19일(현지 시각) 알렝 베르트하이머 샤넬 최고경영자(CEO)는 이날 "그는 창조적인 천재성과 관대함, 뛰어난 직감으로 시대를 앞서갔고 샤넬이 전세계적으로 성공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며 "나는 오늘 친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창조적 감각까지 모두 잃었다"고 라거펠트의 죽음을 애도했다. 샤넬의 패션 사업 부분을 이끄는 브루노 파블로브스키도 "칼 라거펠트는 가브리엘 샤넬의 전설과 남겼고 샤넬 하우스 역사에 발자취를 남겼다"고 했다
라거펠트는 끌로에, 펜디, 샤넬 등 기존 럭셔리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패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나는 다국적 패션 현상(Fashion phenomenon)이 되고 싶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 라거펠트는 자신의 말대로 패션 현상이었다. 1933년 9월 10일생인 라거펠트는 어릴 적부터 예술과 옷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1954년 국제양모사무국 콘테스트에서 코트 부문 1등을 하면서 파리 패션계에 입문했다. 이후 패션 브랜드 피에르 발망, 장 파투 등에서 경력을 쌓았다
라거펠트는 1964년부터 패션 브랜드 끌로에에 수석 디자이너로서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또 1965년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펜디에 합류에 펜디를 혁신하면서 세계적인 브랜드 자리에 올려놨다. 그는 모피 가공 기술로 유명한 펜디에서 모피를 여러 형태로 변형해 현대적인 디자인을 만들어냈다. 펜디의 상징이 된 ‘더블 F(에프)’ 로고도 라거펠트의 작품이다. 사진은 샤넬 매장 앞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의 모습
라거펠트는 1982년 샤넬에 공식 영입돼 샤넬을 재창조했다. 당시 오뜨 꾸뛰르 디자이너가 아닌 기성복 디자이너로 활동한 라거펠트의 경력은 거센 반발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업계는 독일인이라는 점도 탐탁지 않아 했다. 그러나 그는 1983년 1월 샤넬 오뜨 꾸뛰르 컬렉션 데뷔 무대를 성공적으로 선보이며 ‘죽은 샤넬을 환생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라거펠트는 기존 샤넬 아이템과 대중적인 문화 요소를 결합해 젊은 층까지 샤넬의 열성 팬으로 만들었다
라거펠트는 까만 선글라스와 백발(白髮)의 포니테일 머리, 검은색 바지, 바짝 선 칼라, 크롬하츠 액세서리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그는 신비주의를 고수하고 있지만 휴가를 반납하면서까지 일에 매달리는 일 중독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패션 정신은 구찌의 톰 포드, 디올의 존 갈리아노, 지방시의 리카르도 티시, 보테가 베네타의 토마스 마이어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