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AI(인공지능)센터 건립을 위해 500억원을 기부한 김정식 대덕전자 회장은 노환으로 한 대학 병원에 입원 중이다. 기부금 전달식 전날 병원으로 찾아가자 김 회장은 "회의실에서 만나자"고 했다. 병실에서 손님을 맞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휠체어를 타고 회의실로 들어온 김 회장은 "앉은 채 인사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바지는 환자복이지만 위는 셔츠에 재킷을 입었다. 아들 김영재 대덕전자 사장이 동석했다.

김정식 회장이 지난 17일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서울대에 500억원을 기부하게 된 계기를 설명하고 있다. 김 회장은 본지 1월 1일 자 '질주하는 세계—대학' 편(작은 사진)에 실린 MIT의 혁신을 보고 기부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왜 AI(인공지능)센터인가.

"우리 회사 주력 상품인 PCB(printed circuit board·인쇄회로기판)는 기술 변화에 민감하다. 흑백 TV에서 시작해 지금은 스마트폰에도 들어간다. 상품이나 시장이 바뀌면 그 변화를 재빨리 따라가야 했기에 50년간 시장의 변화를 제일 먼저 읽으려고 노력했다. 지금은 AI를 핵심으로 한 4차 산업이 우리가 갈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학교가 예전 그대로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부를 결심하신 계기는.

"4차산업 핵심은 AI인데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AI 연구 시설이 있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다 조선일보 기사를 읽고 '아, 이거다!' 싶었다. 우리 회사가 하드웨어 부품을 생산하지만 이제 이름만 하드웨어지, 하드웨어 개념은 사라졌다. 모든 분야에 소프트웨어를 접목해야 한다. 때마침 서울대 공대에서도 'AI 센터를 짓고 싶은데 도와달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내가 나이도 있고 이제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서 뭔가 해보자는 생각에 기부를 결정했다."

아들 김영재 사장이 거들었다. "1월 1일 조선일보에 실린 미국 MIT의 AI 단과대 설립 기사를 보시고 저를 부르셨어요. '다른 나라는 이렇게 앞서가는데 퇴원 후로 미룰 일이 아니다'라며 병실에서 AI 센터 기부를 결정하셨죠."

김 사장은 "아버지는 평소 일본 경제신문과 공학 잡지도 챙겨 보시는데 '우리 전자 산업이 갈 데까지 갔다. 남의 것 모방하는 건 안 된다. 돌파구가 필요하다'고 자주 말씀하셨다"고 했다. 듣고 있던 김 회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게 공부하셨다고 들었다.

"내가 열아홉 살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나와 어린 여동생 셋뿐이었다. 대학 휴학하고 호텔 웨이터로 일했다. 이웃에 살던 조선호텔 지배인을 찾아가 사연을 말했더니 일자리를 줬다. 전쟁이 나던 해에는 주변 도움으로 간신히 학비를 냈다. 그래서 대학 입학은 6회로 했는데, 졸업은 12회랑 같이 했다."

김 회장은 동생을 두고 입대한 시절 이야기가 나오자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예전부터 이공계 분야에 기부하셨다.

"6·25전쟁이 나자 대학교수님, 선후배, 친구들과 함께 군에 동원됐다. 공군사관학교에서 훈련받고 대구에 있는 부대에서 통신장교로 복무했다. 그때 기술에 눈을 떴다. 전역 후 나는 사업을 시작했고, 동문들은 학자가 됐다. '사업을 하는 네가 학회 활동 좀 도와달라'고 부탁해 학회 운영비를 지원했다. 금리가 높던 시절이라 재단을 만들어 꾸준히 후원하기로 했다."

김 회장은 재단 이름을 '해동과학문화재단'으로 정했다. 해동(海東)은 김 회장 아버지의 호(號)다. 아버지는 빚을 얻어 다른 사람에게 빌려 준 게 탈이 나 병을 얻어 세상을 떴다. 김 회장은 "재단 이름을 정하려니 '해동'이라는 단어가 그냥 떠올랐다"고 했다.

―기부 기준이 있나.

"기브 앤드 테이크(give&take)에서 '기브'만 본다. 단, 기부받은 곳이 잘 활용하는지는 꼼꼼히 챙긴다. (내 후원으로) 전국 공대에 들어선 해동도서관을 찾아 직접 살펴보곤 했다."

―앞으로 계획은.

"나는 교수들도 PCB가 뭔지 모르는 진공관 시대부터 우리나라 전자 산업 발전을 다 지켜봤다. 앞으로 미래가 어떨지 내가 다 알지 못한다. 다만 더 늦지 않게 (AI 센터에 기부) 결정 내린 건 타이밍이 좋다고 본다. 기부로 짓는 건물은 (나를 기리는) 기념관으로 짓는 게 절대 아니다. 지금 세계는 AI로 급변하는데 (서울대가) 잘 활용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