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28일 발행된 하와이 조간신문 ‘퍼시픽 커머셜 애드버타이저’. ‘한국의 독립선언이 드러나다’라는 1면 톱 기사 제목을 달았다. 빨간색 점선 안은 독립선언서 영문 全文.

‘Korean Independence Declaration Bared’(한국의 독립 선언이 드러나다).

1919년 3월 28일 하와이 대표 일간지 ‘퍼시픽 커머셜 애드버타이저’(이하 애드버타이저)는 1면 톱 기사 제목을 이렇게 뽑았다. 애드버타이저는 이날 1면 거의 전면에 걸쳐 3·1운동을 비롯한 한국의 독립운동 소식을 전하고 영문으로 번역한 기미독립선언서 전문을 실었다. 독립선언서 영문 번역 전문을 보도한 것은 이 신문이 처음이다. 하와이에서 51년째 살고 있는 이덕희(78) 하와이한인이민연구소장은 해당 신문 지면을 찾아내 본지에 처음 공개했다.

이덕희 소장은 지난달 22일 호놀룰루에서 기자와 만나 “3·1운동 전후 하와이에서 발행된 조간신문 애드버타이저와 석간신문 ‘호놀룰루 스타-블레틴’을 전수 조사했다”면서 “두 신문은 3·1운동 1주년인 1920년 3월까지 각각 80여건에 이르는 한국 독립운동 기사를 실었는데, 애드버타이저가 게재한 독립선언서 전문은 미주 본토의 보도보다 10일 앞선 것”이라고 말했다. 애드버타이저는 1856년 창간해 1921년 ‘호놀룰루 애드버타이저’로 제호를 바꿨고, 2010년 ‘호놀룰루 스타-블레틴’이 인수해 현재 ‘호놀룰루 스타-애드버타이저’라는 이름으로 발행되고 있다.

애드버타이저가 3·1독립선언서 전문을 실은 때는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난 뒤 27일 지난 때였다. 샌프란시스코 한인 단체 국민회가 발간한 한글 신문 ‘신한민보’는 4월 8일자에 영문 독립선언서 전문을 실었다. 신한민보가 실은 영문 독립선언서는 애드버타이저 독립선언서에서 오타만 수정했을 뿐 완전히 같은 번역문이다. 애드버타이저가 실은 독립선언서는 이후 영문 번역 독립선언서의 원형이 됐다.

하와이 지역 신문이 한국의 독립선언에 큰 관심을 보이고 1면 전면에 걸쳐 보도한 까닭은 당시 하와이 인구 구성에서 주요 기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1920년 통계) 하와이 인구 25만5912명 중 한인 인구는 4950명으로 약 2%에 달했다. 일본인 인구는 10만9274명으로 하와이 인구의 43%를 차지했다. 한국의 독립선언은 지역 인구 절반에 가까운 한국계와 일본계 인구가 관심을 쏟을 기사였다.

애드버타이저는 영문 독립선언서를 ‘MANIFESTO’(성명서)라는 제목 아래 2단 박스로 편집했다. 첫 문장 ‘오등(吾等·우리)은 자(玆·이)에 아(我·우리)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는 “We herewith proclaim the Independence of Korea and the liberty of the Korean people’로 번역했다. 본문에 이어 나오는 ‘공약삼장(公約三章)’ 중 첫째 항목인 ‘금일 오인(吾人)의 차거(此擧)는 정의·인도·생존·존영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이니,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오,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하지 말라”는 대목은 ‘This work of ours is in behalf of truth, religion and life, undertaken at the request of our people, in order to make known their desire for liberty. Let no violence be done to anyone’으로 영역했다. 선언서 끝에는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을 영문으로 덧붙였다.

애드버타이저는 영문 독립선언서를 어떻게 확보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덕희 소장은 캘리포니아에서 발행되는 신문 ‘새크라멘토 비 (Sacramento Bee)’의 발행인 맥클랫치(V.S. McClatchy)를 애드버타이저가 3월 27일 인터뷰하면서 받은 것으로 추정했다. 맥클랫치는 3·1운동 당시 한국을 방문 중이었다가 현장을 목격했고, YMCA 관계자로 추정되는 미국인에게서 영문으로 번역한 독립선언서를 받았다. 맥클랫치는 미국으로 돌아오는 도중 3월 27일 호놀룰루에 들러 애드버타이저와 인터뷰했다. 애드버타이저는 인터뷰 기사를 3월 28일자 하단에 ‘맥클랫치, 항거를 시작한 한인들이 몽둥이로 맞는 것을 목격’이라는 제목으로 실었다. 맥클랫치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이 선언서를 AP 통신에 주었고, 또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Examiner)와 인터뷰해 이 신문 4월 6일자에 ‘한인의 무장혁명 의거’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덕희 소장은 내달 15일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에서 열리는 한국독립운동 100주년 학술대회에서 ‘기미년 3·1운동 후 하와이 한인의 활동’이란 주제로 이같은 내용을 발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