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노스아이레스=안상현 특파원

지난달 27일 오후(현지 시각) 브라질 최남단 항구도시 포르투알레그리의 해변공원. 기온이 35도가 넘는 무더위였지만 공원은 스마트폰을 손에 쥔 수천 명의 사람으로 북적였다. 스마트폰만 바라보며 공원을 배회하던 사람 중 일부가 "비바(Viva·만세)!"를 외쳤다. 증강현실(AR) 기술을 적용해 전 세계적 히트를 친 모바일 게임 '포켓몬고'를 즐기던 이들이 가상의 괴물(포켓몬) 포획에 성공하자 기쁨의 탄성을 지른 것이다.

'포켓몬고' 개발사인 미국의 나이언틱은 이 도시에서 3일간(1월 25~27일) '사파리존'이란 이벤트를 진행했다. 평소 잡기 어려운 희귀 포켓몬이 특정 장소·시간대에 대거 등장하는 이벤트로 전 세계 게이머 2만2500명이 브라질로 몰렸다. 그간 이런 행사는 미국과 유럽, 아시아에서 열린 적이 있었지만 남미에서 개최된 건 처음이다. 남미 최대 게임시장으로 성장한 브라질을 위해 마련한 이벤트였다.

◇10년 만에 10배 커진 브라질 게임 시장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등 선도 신흥국을 가리키는 '브릭스(BRICs)'에서 맨 앞자리를 차지했던 브라질은 2015~16년 2년 연속 -3%대의 성장률을 기록하는 등 최근 몇 년간 극심한 경기 침체를 겪었다. 석유와 원자재 수출에 의존하던 산업구조가 최대 고객인 중국의 성장 둔화와 저(低)유가에 맞닥뜨린 결과였다.

여기는 브라질, 포켓몬 잡고 "비바, 비바" - 지난달 27일 브라질 최남단 항구 도시 포르투알레그리의 해변공원에서 열린 게임 포켓몬고의‘사파리존’행사에 참여한 게이머들이 손을 번쩍 들고 환호하고 있다. 3일간 열린 이 행사에는 전 세계 게이머 2만2500명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브라질에서 이런 경기 침체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가파르게 성장 중인 산업이 있다. 게임 산업이다. 국제 시장조사기관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브라질의 게임 판매액은 2018년 20억달러(약 2조2500억원)를 기록한 것으로 집계됐다. 182조원에 달하는 세계 게임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작지만, 2008년 2억달러에 불과했던 매출이 매년 늘어 10년 만에 10배로 뛰었다. 컨설팅업체 PwC는 "브라질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 게임이 인터넷 광고 다음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브라질 게임 산업의 위상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는 남미 최대 게임 행사로 자리 잡은 '브라질게임쇼(BGS)'다. 2009년 처음 개최됐을 땐 방문객이 400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작년 10월에 열린 게임쇼의 방문객은 32만명에 달했다. '세계 3대 게임 전시회' 중 참가자가 가장 많은 독일의 '게임스컴' 방문자 수(약 37만명)에 필적하는 수준이다. 특히 이번 게임쇼에는 '스트리트파이터'의 개발자 요시노리 오노, '철권(Tekken)'의 가쓰히로 하라다 등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개발자들이 대거 참석하는 등 국제 게임쇼다운 면모를 보여줬다.

◇스마트폰 보급 확대가 견인차

브라질 게임 시장의 가파른 성장 배경에는 두꺼운 수요층이 있다. 미국 게임시장 조사업체 뉴주(Newzoo)에 따르면, 브라질의 게임 이용자는 2018년 7570만명으로 집계됐다. 전년(6630만명) 대비 940만명이 늘었다. 이는 세계 4번째 규모로, 브라질 인구 3명 중 1명 이상(35.6%)이 게임을 즐긴다는 것을 뜻한다. 브라질 전체 인구는 세계 5위 규모로 2억1239만명에 달한다.

우선 스마트폰 보급 확대가 게임 수요 증가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브라질의 스마트폰 보급 대수는 매년 20%쯤 증가해 2017년 기준 1억9800만대에 달했다. 국민 1인당 스마트폰 한 대씩 갖는 수준에 다다른 것이다. 이에 스마트폰에서 이용할 수 있는 모바일 게임 시장이 급격히 커졌다. PwC에 따르면, 작년 브라질 모바일 게임 분야 매출은 3억2400만달러로 PC게임(3억1400만달러)이나 콘솔 게임(2억1100만달러)보다 컸다. 브라질 게임시장 분석업체 PGB 역시 브라질 게이머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게임 단말기는 스마트폰(84%·2018년 기준)이라는 설문 조사 결과를 내놨다.

이 밖에도 브라질 현지 일간지 '오 글로부(O Globo)'는 게임산업의 성장 동력으로 컴퓨터 기기에 대한 브라질 정부의 세금 감면 혜택 등을 꼽았다. 브라질 정부는 현지에서 컴퓨터 하드웨어를 생산하는 업체엔 수입 통관 때 부과하는 부가가치세(공업세)를 감면해주고 있다. 최근 몇 년간 브라질 헤알화 가치 하락으로 수입 물가가 오르자, 게임기 제조업체들은 이 같은 세금 감면 제도를 등에 업고 브라질 현지에 공장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게임용 하드웨어 판매가가 급격히 떨어졌고, 소비자들이 싼 가격에 구매할 수 있게 됐다. 예컨대 다국적기업 소니의 주력 콘솔 게임기인 '플레이스테이션 4'는 과거 브라질 현지 판매가가 4000헤알(약 121만원)을 웃돌았지만, 현지 생산이 시작된 이후에는 1300헤알(약 39만원)까지 떨어졌다.

◇게임 개발 능력은 아직 역부족

브라질 게임 시장에서 발생하는 시장 매출의 90% 이상은 해외 게임이 차지하고 있다. 한국 게임 개발사가 만든 인기 온라인게임 '검은사막', '블레이드앤드소울' '테라' '라그나로크' 등도 현재 브라질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모바일 앱 시장(구글 앱스토어)에서 가장 많이 다운로드된 게임 역시 미국, 호주, 홍콩 등 모두 외국산 게임이다.

브라질에서 열린 게임 포켓몬고 '사파리존' 행사에서 한 브라질 게이머가 게임 원작 만화인 '포켓몬' 주인공의 복장을 흉내 내 착용하고 있다.

거대한 시장 규모와 달리 자체적인 개발 능력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브라질 FEI 대학에서 2017년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현재 브라질의 게임 개발사는 375개에 불과하다. 인구 수가 4분의 1에 불과한 한국의 게임 개발사 수(2017년 기준 888개)와 비교하면 절반에도 못 미친다. 그러나 현지 개발 업체의 성장 속도는 빠르다. 게임 개발사가 133개였던 4년 전과 비교하면 180% 이상 늘었다. FEI 대학 조사에 응답한 227개 업체는 2년간(2016~17년) 1718개의 게임을 개발했다고 답했다.

브라질 정부도 게임산업 발전을 위한 지원 방안을 고심 중이다. 1억헤알(약 300억원)에 달하는 정부 예산 지원안과 더불어 정부 산하 게임산업 지원팀을 구성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