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미나토구(港區) 아자부주반(麻布十番)의 주일본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10분만 걸으면 미타1초메(三田1丁目) 10번지 11호에 다다른다. 흰색 외벽이 눈길을 끄는 4층짜리 작은 맨션. 작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36층짜리 타워맨션이 우뚝 서 있다. 북쪽을 바라보면 도쿄타워가 보인다. 100년 전 2·8독립선언 거사 전야, 조선청년독립단이 찾았을 '이토(伊藤)인쇄소'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이토인쇄소'는 2·8독립선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장소다. 조선청년독립단이 1919년 2월 7일, 일제 외무성과 해외 각국 대사관에 보낼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 1000여 장을 인쇄한 곳이다. 주인 이토 류타로는 태평양전쟁 전 세상을 떠났다. 1980년대 당시 '이토인쇄소'를 기억하던 인근 이웃들은 "그의 처(妻)가 사업을 이었지만, 전쟁 후 인쇄소 사정이 나빠지자 이사했다"고 전했다.

현재 일본 도쿄 재일본한국YMCA 사옥 앞에 세워진 2·8 독립선언기념비.

이곳에서 인쇄한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는 독립선언문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조선민족대회 개최를 허가해 달라'고 당당히 요구하는 내용이다. 조선이 일제의 강제 병합 이래 10년간 생존과 발전을 위협받고 있다는 비판도 담겼다. 청원자는 '조선청년독립단 대표'라는 설명과 함께 최팔용 등 2·8선언서에 이름을 올린 11명이다. '내란죄'에 따른 중형을 각오한 행동이다.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의 토대를 만든 건 춘원 이광수다. 당시 스물일곱이었다. 그는 훗날 펴낸 '나의 고백'(1948)에서 "나는 내가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일본 의회에 보내는 글과 그것을 인쇄할 돈 300원을 최팔용에게 주었다"고 적었다. 조선청년독립단 대표 중 한 명인 백관수와 세이소쿠영어학원 학생 김희술은 도쓰카초(戶塚町)로 불리던 동네에서 자취했다. 백관수의 집은 '작전 본부'와도 같았다. 국문·일문판 '독립선언서'와 '독립선언서 부(附)결의문'은 김희술의 자취방에서 인쇄했다고 전해진다. 조선기독교청년연맹에서 빌려온 등사기로 600장씩이다.

2·8독립선언 현장인 조선기독교청년연합(재일본 한국 YMCA의 전신)의 기독교청년회관도 사라졌다. 도쿄 지요다(千代田)구 니시간다(西神田)에 있던 2층짜리 건물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완전히 무너졌다. 이 자리엔 5층짜리 빌딩이 들어섰다. 1층엔 세탁소가 영업 중이다.

2·8선언 이튿날 도쿄 아사히신문은 '조선학생 대검거, 60여 명 니시간다서(署)에…강제 연행 도중 수 명 부상'이라는 짧은 기사로 전했다. 다즈케 가즈히사 2·8독립선언 기념자료실 실장은 "식민지 청년들이 종주국 수도에서 독립선언을 하는 건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용감한 일"이라고 했다.

이날을 기억하는 건 지금 재일본 한국 YMCA 건물 앞에 서 있는 2·8독립선언 기념비, 이 건물에 자리 잡은 2·8독립선언 기념자료실뿐이다. 재일본 한국 YM CA는 1929년 옛 자리에서 600m 떨어진 지요다구 사루가쿠2초메(猿樂2丁目)에 새로 자리를 잡았다. 오는 8일에는 2·8 독립선언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를 연다. 피우진 국가보훈처장, 이수훈 주일대사와 애국지사 유가족 등 250여명이 참석한다.

2·8독립선언 현장에 기념비를 세우는 일은 숙제로 남아 있다. 다즈케 기념자료실장은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이 있던 곳은 사유지라 한·일 관계가 돈독해지면 그때 소유주와 함께 실마리를 찾아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