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스무 명이 모여 한 권의 책을 만들었다. 살아온 생을 모두 합하면 1600년이 넘는 세월. 별일 아닌 듯 써 내려간 글에 한국 근현대사가 담겨 있고, 여성의 삶이 녹아 있다. 일본군에게 잡혀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친구, 전쟁 중 피란길에 죽은 동생을 업고 온종일 걸어야 했던 어느 날, 혼자된 친구를 살갑게 챙겼더니 남편을 좋아해 느꼈던 배신감, 글을 몰라 거리의 간판이 다 외국어처럼 느껴졌던 답답함 등 가슴을 울리는 할머니들 이야기는 끝이 없다.

만만치 않은 삶을 꿋꿋이 헤쳐 온 할머니들은 글만이 아니라 따뜻하고 개성 넘치는 그림까지 그렸다. 그림의 재미에 빠져 저마다 수십, 수백 장을 그려, 모두 모으니 수천 장이 되었고 실력도 깜짝 놀랄 정도다. 지난해 서울 한 갤러리에서 전시를 열었는데 매일같이 사람이 가득 찼고 모두 할머니들의 예술 감성에 감탄했다. 올해는 뉴욕, 워싱턴 DC, 필라델피아 등 미국 전시 계획도 잡혀 있다.

책과 전시로 어엿한 작가가 된 스무 명의 할머니는 사실 글과 그림을 배운 지 불과 2~3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쉽지 않은 생을 힘껏 살아온 자세로 공책과 스케치북을 채웠고 그 속에 진한 인생이 담겼다. 이를 모으고 추려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남해의봄날)로 엮었다.

편집자인 내게 스무 명 할머니는 웃음도 눈물도 많은 우리 할머니 같고, 바쁘다는 핑계로 안부 전화도 겨우 드리는 엄마 같고, 아직도 인생에 어설픈 내 모습 같고, 또 가끔은 마냥 꿈 많은 우리 아이 같았다. 할머니 안에 살아 있는 그 많은 이들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풍성해졌다. 온 가족이 모이는 명절, 집집마다 따뜻한 그림과 글을 나누며 온기 가득한 이야기들이 오고 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