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 인류의 비위 맞추고픈 사람"
고도자본주의가 낳은 반가운 재벌 3세, 정경선
"할아버지(정주영)는 내 정체성의 99.9%... 100억 이상은 사회가 맡긴 것"
26살에 소셜 벤처와 혁신가 돕는 '루트임팩트' 설립
노숙인, 장애아, 위안부 할머니… 자립 사업에 적극 투자

정경선 루트임팩트 CIO. 선의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회 혁신가들의 엔젤이자 소셜 벤처 투자자.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과 해야만 하는 것 사이에서, 우리는 갈지자로 걸으며 세상을 살아간다. 부모의 기대와 나의 자존 사이에서 반항과 투항을 반복하며 길들여진다. 두렵거나 부럽거나 감정의 사냥 본능으로 타자와는 매일이 전쟁이고 휴전이다. 빈자의 길도 부자의 길도 그 갈등의 ‘루틴'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정경선을 만나기 전까지는.

"전 인류의 비위를 맞추겠다" "아시아 최고의 호구가 되겠다"는 야심가가 나타났다. 현대가 재벌 3세 정경선. 그의 조부는 전설의 기업인 정주영 회장이며, 부친은 현대해상화재보험의 정몽윤 회장이다. 상속자이며 동시에 자선가인 32살의 남자.

영화 ‘베테랑'의 망나니 재벌 3세, 조태오와는 정반대 지점에 있는 사람. 타인의 고통에 무감하다는 점에서 영화 속 재벌 3세는 고도자본주의 사회가 낳은 가여운 괴물이었다. 정경선은 고도자본주의 사회가 낳은 반가운 돌연변이다.

‘타인의 고통에 민감한' 그는 26살부터 비영리사단법인 루트임팩트(2012년)와 소셜 벤처 투자사 HGI(2014년)을 세워 체인지메이커라 명명된 사회 혁신가와 기업에 후원과 투자를 병행하고 있다.

그 과정에 노숙인에게 일자리가 생기고(두손 컴퍼니), 위안부 할머니들과 연결된 어여쁜 굿즈가 만들어지고(마리몬드), 싱싱한 농작물이 소비자를 찾고(소녀 방앗간), 청년들과 창작자들에게 안전한 거처가(안전가옥), 손이 빈 아이들에겐 돌봄 교사가 매칭됐다(째깍 악어).

그가 성수동에 세운 8층 건물 헤이그라운드에는 변화를 꿈꾸는 체인지메이커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스타트업이 줄기차게 모여들고 있다. 이제 성수동은 소셜 벤처의 성지가 되었다. 과연 좋은 일이 돈도 된다는 그의 사회적 기업 모델이 병목 된 자본의 길을 뚫고 자본주의의 밝은 점이 될 수 있을까.

정경선을 만났다. 마침 그는 우리 사회의 밝은 점을 자처하고 나선 20명의 체인지메이커들을 인터뷰한 책 ‘당신은 체인지메이커입니까?’를 출간한 직후였다.

‘한국은 지나치게 많은 상황에서 ‘다수의 행복'이라는 명목으로 충분한 합의 없이 약자들의 희생을 강요해왔고, 약자들의 편에 서는 사람들에게 ‘사소한 일로 산통을 깬다’고 손가락질을 해왔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의 논의를 통해, 외형적으로만 그럴듯한 성장은 모든 구성원에게 공평하게 행복을 돌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정경선의 책 ‘당신의 체인지메이커입니까’ 중에서

조금 일찍 약속장소인 헤이그라운드에 도착해 보니 1층에서 흥미로운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일명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시각장애아들이 촉각으로 더듬어 그린 코끼리 전시는 아름답고 환상적이었다. 비주류의 시선도 가치 있게 역전시키는 기획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탭댄스를 추듯 흥겨운 발걸음으로, 그가 들어왔다.

그는 얼마전 사회혁신가 20명을 인터뷰한 책 ‘당신은 체인지메이커입니까?’를 출간했다.

-정체가 뭡니까?

"제 목표가 ‘아시아 최고의 호구가 되겠다'였어요(웃음). 본질적으로 남들이 평안해야 나도 평안하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자원과 영향력으로 남을 돕자는 거죠. 그런데 기자님 내신 인터뷰 책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에서 보니 93세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선생님이 ‘건달처럼 살라' 하시더군요.

‘남이 내 비위 안 맞춰주니 내가 내 비위 맞춰 살아야 한다'고. 그 말도 굉장히 공감했어요. 저는 이제까지 제 비위보다 ‘전 인류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방향은 맞지만 저를 과대평가해서 완급조절이 안 되니 힘들어지더라고요(웃음)."

-무슨 말이지요?

"체인지메이커를 돕는 일을 시작한 지 4년째 되던 해. 2016년 즈음에 커뮤니티에서 여러 갈등이 올라왔어요. 선의가 모든 문제 해결하는 건 아니더라고요. 서럽기도 하고 화도 났죠. "굳이 다른 일을 해보겠다더니… 그럴 줄 알았다!" 비난이 쏟아질 게 뻔하니 티도 못 내고 끙끙 앓았어요. 그때 왜 힘든가, 저 자신을 들여다봤더니 한국에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없어서였어요."

-최전선에 있는 사람의 숙명이죠. 기부 문화가 고도로 숙성된 서양에서도 시작단계니까요.

"맞아요. 고민하다 깨달았어요. "나는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 하하. 나에게 한정적인 자원을 주는 아버지에 기대서 일을 시작했고, 운 좋게도 좋은 사람들과 일하고 있을 뿐. 그동안 ‘아시아 최고의 호구가 되겠다'는 목표가 저의 동력이 되긴 했지만, 그것만으론 이 일을 지속할 수 없다는 거죠."

-그래서 어떤 결론을 내렸나요?

"더 나은 사회를 위해선 좀 더 냉정해져야겠다."

-과묵한 사람일 줄 알았더니, 달변가군요.

"말하는 걸 좋아해요(웃음). 대표 타이틀을 단지도 7년이에요. 동물학자 최재천 교수님이 ‘상호허겁'이란 말씀하셨잖아요. 적당히 비겁하고 눈치 보는 관계가 좋은 거라고요. 구성원들과도 서로 헤아리며 재밌게 지내려고 해요.

생각해보면 어릴 때 저는 주류에 잘 끼지 못하는 특이한 애였어요. 그런 제가 살아남는 방법은 ‘웃기기’였어요(웃음). 미국의 유명한 토크쇼 진행자인 코난 오브라이언이 그랬죠. 청소년기에 두들겨 맞지 않기 위한 극한의 노력이 ‘웃기기’였다고요. 그 얘기 들으면 전 눈물이 나요."

-출신성분이 성장기엔 오히려 번민이었다?

"꼭 출신성분 때문만은 아니고요. 가족 전체가 비즈니스에 종사하면 관계에도 비즈니스 가풍이 있죠. 남성 중심의 위계 사회다 보니 문학을 좋아하는 저 같은 아이는 낄 틈이 없었달까요. 저는 동년배보다 할머니, 외삼촌, 외숙모와 어울렸어요(웃음). 학교도 그랬죠. 공차고 땀 흘리는 친구들 눈에 구석에서 책 읽는 아이가 얼마나 찌질해 보였겠어요?"

게다가 이 문학 소년의 백그라운드는 현대가를 일으킨 전설의 기업인 고 정주영 회장. 중고교 시절, 낯선 친구들이 불쑥불쑥 "느이 할아버지가 정주영이라며?"라며 시덥잖게 그의 DNA를 들먹일수록 소년 정경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깊어져 갔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 해맑은 미소를 띤 채 그가 말했다. "재벌 3세들이 왜 그런지 아세요?"

-궁금해요. 그들이 죄책감과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이유가 뭡니까?

"제 나름대로 분석을 했어요(웃음). 보통 2세들은 창업 과정에 동참도 하고 테스트 과정도 혹독하게 겪어요. 반면 3세는 완벽한 상속자 그룹이죠. 그동안 기업은 이미 개인을 넘어서 사회 공동의 재산이 되어있어요. 이때 3세는 하나의 질문과 맞닥뜨립니다. 내가 이걸 맡을 ‘깜냥'이 되나? 이 질문에 대처하는 길이 3가지예요.

첫째, 난 특별하니까 이건 당연히 내 것이라는 선민의식. 둘째, 운명의 수레바퀴를 받아들이고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불철주야 받는 후계자 수업. 보통 선민의식이라는 쉬운 길을 선택한 3세들이 문제를 일으키죠. 세 번째가 바로 접니다. 최선을 다하겠지만, 이게 정말 나의 최선인가, 번민하는 인간."

그는 자신이 다른 재벌 3세와 다르다면 그건 99.9% 부모님 덕분이라고 했다. 가업을 이어야 하는 상황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너는 너다'라는 여지를 주었기 때문.

-기업의 후계자가 된다는 건 당신에게 운명인가요? 선택인가요?

"압도적으로 매력적인 선택지가 있는데 그게 절대적이지는 않다는 열린 대화가 가능했어요. 부모님과 저 사이에. 그래서 저는 스스로 그 운명을 선택한 거죠."

-현재 사회 혁신가를 돕는 루트임팩트와 투자사 대표인 동시에 콜롬비아 대학에서 MBA 과정을 밟고 있지요? 이보다 완벽할 수는 없네요. 무엇을 배우고 있습니까?

"콜롬비아는 가치 투자를 설파한 워런 버핏을 신으로 추앙하는 곳이죠(웃음). 사회적 기업가 출신들의 연구 센터도 잘 되어 있습니다. 저는 비영리단체와 사회적 기업에 관한 강의를 많이 듣고 있어요. 가령 도시 안에서의 효과적인 자선에 대한 실용적인 수업 같은 것들.

이를테면 한 재단이 후원해서 학생 5명에게 각각 2만 5천 불을 줘요. 그걸로 좋은 단체를 선택해 기부를 실행해 보라는 거죠. 어떤 이슈를 선택할 지부터가 큰 공부예요. 고도의 자선사업가, 공공사업가들과 교류하는 거죠. 지금 저희도 청년 공동 주거 등 사회적 부동산 프로젝트를 하고 있어서 학교에서 공익 부동산 수업도 열심히 듣고 있어요."

정경선은 공립 중고등학교를 나와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후 현재 콜롬비아대학교에서 MBA과정을 밟고 있다.

-국문과를 가려다 집안 어른의 반대로 경영학과로 길을 틀었다고요. 후회는 없습니까?

"후회는 되죠(웃음). 하지만 가상의 도피처가 있다는 건, 좋습니다."

-복 받은 사람이군요.

"인정해요. 저는 압도적인 운을 타고났어요. 유복한 집안에 부모, 친구들도 좋았죠. 큰 트라우마는 없었어요."

-콜롬비아 대학의 동료들은 당신을 어떻게 대합니까?

"제가 누군지 따윈 그들의 관심사 아니죠(웃음). 참, 얼마 전에 학생들이 한국 투어 왔을 때 제가 가이드를 해서 알려지긴 했네요. 남들 비위 맞춘다는 일념으로 최선을 다했거든요(웃음)."

-익명성과 유명세, 어느 쪽이 편한가요?

"글쎄요. 그 어느 쪽도 불편하진 않지만, 뭘 해도 평가받는다는 느낌은 불편해요. 어머니는 제가 방송에 노출되는 걸 보고는 걱정하세요. "넌 이제 편하게 살긴 글렀다. 다 너를 착하게 생각할 텐데, 잘못하면 끝장이야." 전 제가 하는 일이나 체인지메이커들을 더 많이 알리고 싶어서 인터뷰를 해요. 가끔 카페에 앉아있는 저를 알아보고 무작정 말을 거시는 분들도 있어요. 자기가 하는 일을 좀 도와달라거나(웃음), 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다짜고짜 물으시면서."

-그런 사람들에겐 뭐라고 답하지요?

"결정적인 계기는 없다고 해요. 저는 많이 사랑받으며 자랐다고요. 그런데 중고등학교 때 워낙 이질적인 아이다 보니 괴롭힘과 삥뜯김을 조금 당했고 그때 이런 악의와 폭력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고민을 했어요. 악을 단죄하고 격리하는 건 소용 없다, 느리더라도 환경을 바꿔야 한다는 게 제 결론이었어요. 다행히 제겐 그 결심을 행동에 옮길만한 자원이 있었고요(웃음)."

청소년기의 각성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인생의 방향을 결정했다는 정경선.

성수동을 소셜 벤처 밸리로 만든 헤이그라운드. 헤이그라운드에는 변화를 꿈꾸는 체인지메이커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스타트업이 줄기차게 모여들고 있다.

-얼마 전 당신이 20명의 사회혁신가들을 인터뷰한 책 ‘당신은 체인지메이커입니까?’를 읽었어요. 질문자로서의 자세도 정말 공손하더군요.

"저는 남 비위 맞추는 게 숙달된 사람이라니까요. 하하. 게다가 저는 대리인이에요. 변화를 실천하는 그분들이 주인공이죠."

그가 책에 소개한 여러 체인지메이커 중 교육 기업인 에누마 대표 이수인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녀가 만든 교육용 소프트웨어는 실리콘밸리에서 주목받은 후 탄자니아, 케냐 등 난민촌 아이들에게 보급돼 놀라운 성적 향상을 이끌어냈다. 국제 사회는 "이 분야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물건을 본 적이 없다"며 놀라워했다.

이수인은 장애를 겪는 자신의 아이를 교육하기 위해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똑똑한 아이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소리를 못 듣거나 좀 느리게 반응하는 아이들도 즐길 수 있도록 접근성을 높였다. 시각적 대비와 사운드, 질문도 장애아를 기준으로 민감하게 설계했더니, 결과적으로 일반 아이들도 더 나은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 것.

-에누마의 대표 이수인은 체인지메이커의 정체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당신의 중요한 파트너더군요.

"그분은 현재진행형의 신화예요. 장애가 있는 내 아이가 나처럼 수학을 재밌게 공부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교육 앱을 만들었어요. 그 노하우를 내 아이 한 명으로 끝내지 않고 비슷한 문제를 겪는 아이들, 나아가 지구촌 모든 지역, 인류 전체와 공유했죠."

-내 아이의 고통에서 출발해 전체를 보듬는, 이런 공감력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요?

"공감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상대의 기쁨과 슬픔, 화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정서적 공감. 또 하나는 존재를 부정당하는 상대의 상황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인지적 공감이에요. 변화를 일으키려면 인지적 공감이 중요해요. 이수인 대표도 장애 있는 아이가 학교에서 겪을 그 상태를 정확히 이해하고 해결책을 찾은 거죠."

조금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구하는 20명의 사람들, 좋은 일과 돈 되는 일은 다르지 않다는 정경선의 주장을 담은 책 ‘당신은체인지메이커입니까'.

-다음커뮤니케이션 창업자였던 이재웅, 전 카카오 대표 김범수 등... 특별히 젊은 IT 기업인들이 소셜 벤처에 적극적인 것도 신기했습니다. 이유가 뭐지요?

"그분들은 자기 산업의 정체성을 잘 알고 있어요. 굴뚝 산업은 몇 명의 노력으로 일으킬 수 있지만, IT와 모바일 기반 비즈니스는 다수의 보통 사람들이 동참해서 이룬 거죠. 더 많은 사람과 어떻게 공존할지에 대한 고민이, 현재 그분들의 부를 만든 거예요. 한편으론 단기간에 부를 이뤘기 때문에 그만큼 좋은 형태로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의식도 강한 것 같습니다(웃음)."

-보통 청년 이범규의 인터뷰도 인상 깊더군요. 적극적인 봉사로 자기 가치를 찾는 모습이 신선했습니다. 젊은 당신이 보는 우리 시대 청년들, 어떤가요?

"저는 청년의 마지막을 붙잡고 있죠(웃음). 지금 밀레니얼 세대는 나라와 기업과 공동체가 나의 미래를 담보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충성과 헌신은 줄고 내 인생 자유롭게 살겠다는 개인성이 강해졌죠. ‘달관 세대’라고도 하던데요(웃음). 하지만 야망 없이 사는 게 목적 없이 사는 것을 뜻하진 않는다고 생각해요. 내 비위 내가 먼저 맞추는 상태에서, 되도록 박수받는 선택을 했으면 싶은 거죠."

-어떤 청년이 체인지메이커가 됩니까?

"제가 체인지메이커들의 여러 인생 경로를 살펴보니 자기 욕구에 충실했을 때가 가장 부작용이 적어요. 옳다고 믿는 사람, 그르다고 믿는 사람이 사실 가장 폭력적이거든요. 그래서 대단히 거창한 일을 하기보다 일상에서 일회용 컵 좀 덜 쓰고, 공정 무역 제품 구매하는 그런 분들이 중요한 체인지메이커라고 생각하는 거죠, 저는."

-기업의 측면에서도 당장의 ‘사익 극대화'가 결국은 기업을 망하게 한다고 썼더군요.

"사익과 공익이 배치되는 회사는 살아남기 힘들어요. 굴뚝 산업계에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전문경영인이 와서 가장 먼저 연구개발 부서 날리고 복지 축소해서 영업 이익을 늘려요. 수순대로 인센티브 챙기고 주가를 올린 다음 주식을 팔고 떠나는 거죠. 사익만 추구하면 회사가 망가져요. 공익과 사회 혁신을 같이 추구해야 회사 이익이 늘어나요. 저는 그걸 증명하고 싶은 거고요."

그의 가장 큰 재산은 ‘자기애’다. 좋은 부모를 만난 것에 감사하고 ‘남들도 자기처럼 사랑받고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희망. 그런데 그 희망이 견고해 보인다. 이미 전 세계 부의 트렌드가 ‘공생’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사진=고운호 기자

-큰 기업을 물려받아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을까요? 대표적인 굴뚝 산업인 현대 일가의 방향성은 어떻게 봅니까?

"현대는 대표적인 인프라 산업이죠. 가령 아마존은 삶의 편리를 도모하는 기술 기업이지만 한편으론 소규모 도소매상을 먹어치우고 고용을 잠식하죠. 인프라 산업은 금융보다는 실물 경제와 고용에 역할이 커요. 그래서 더 민감한 마음으로 지식과 정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신 아버지 회사는 어떤가요? 가입자가 건강할수록 돈을 버는 구조라 외국 보험사도 사회적 기업에 투자를 많이 한다고 들었어요.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의 위치가 당장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발언하는 건 불공정하다고 생각해요(웃음)."

설날 아침 정주영(상석 왼쪽에서 둘째) 회장 일가. 오른쪽 맨 앞에서 떡국을 먹고 있는 소년이 꼬마 경선이다.

정몽윤 회장은 아들이 사회적 혁신가를 후원하는 비영리법인 루트임팩트를 설립할 때 1억 원의 후원금을 냈다. 이밖에 이노션의 정성이 고문과 현대 커머셜의 정명이 부문장, 현대카드의 정태영 부회장이 그를 도왔다.

-삼성가와는 다른 현대가만의 가풍이 있습니까?

"글쎄요, 일단 많이 모이려고 노력해요(웃음). 설이나 추석, 제사에서 일단 모이는 게 우선순위예요. 늘어난 규모를 생각하면 그 노력이 대단하죠. 예의도 중요하게 생각해서 늘 남을 헤아리고 조심하는 버릇이 있어요."

-어린 정경선이 할아버지 정주영 회장과 설날 떡국 먹는 사진을 봤어요. 좀 짠하더군요(웃음).

"하하하. 그렇죠? 그때도 아이들이 너무 많아 장난처럼 번호로 불렀어요. 1-8-2라고(정 회장을 중심으로 여덟째 아들의 둘째 아이라는 뜻)."

-정주영 회장은 당신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저의 알파와 오메가죠. 저의 정체성의 99.9%를 이루는 분입니다. 그분이 20년 전 소 떼를 몰고 판문점을 넘었을 때 저도 다른 사촌들과 나가서 응원했던 기억이 나요. 몇 년 전 제가 할아버지의 다큐멘터리 나레이션을 맡은 적이 있어요. 그때 많이 배웠어요.

할아버지 말씀이 "나는 부의 청지기다. 100억까지는 내 재산이지만, 그 이상 넘어가면 사회 재산이다. 사회가 내게 맡긴 거다" 그러셨죠. 경제를 이룩하신 분이 보는 세상은 역시 다르구나 싶었어요. 또 알고 보니 이미 할아버지는 지역사회교육협의회라는 비영리단체 이사장을 하시면서 바빠도 꼭 챙기셨다고 해요. 어쩌면 제가 그 피를 물려받은 거죠(웃음)."

-현대 패밀리의 일원들은 당신더러 뭐라고 합니까?

"처음에는 잘 모르시다가 최근에는 너 같은 애가 있어서 좋다고 하세요(웃음)."

-기억나는 실패가 있나요?

"자선의 모델이 된 이베이 창업자 피에르 오미디아르나 여성 지원 사업을 하는 노르웨이 왕세자비를 한국에 초청하려고 했는데 잘 안됐어요. 그분들을 초청해서 칭찬을 받고 싶었던 마음이 컸어요(웃음). 저는 필요한 일을 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인정을 못 받고 있다는, 그런 자괴감에 더 집착했던 것 같아요."

-한국 사회에서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나요?

"후원사를 보면 아버지 회사(현대해상)를 제외하면 구글, 씨티은행, 샤넬 재단 등 글로벌 기업이 대부분이에요. 투자하기보다 사업 모델을 베끼겠다는 쪽이 더 많죠. ‘내 돈 써서 네 이름 알리고 싶지 않다'는 거죠(웃음). 서운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합리적으로 생각하려고 해요. 저희랑 일하는 게 압도적으로 이익이라면, 서서히 저희를 찾겠죠."

손윗 누이가 출가한 후 성북동 부모님 집에 기거하며 평범한 30대 아들의 고충과 행복을 누리며 산다는 정경선. 그가 성장기에 부모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특권의식을 갖지 말라'였다.

-존경하는 기업인이 있습니까?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 이런 대가들보다 회사를 망하지 않고 운영하는 모든 기업인을 다 존경해요. 수백 수천 명의 안정적인 일자리를 만드는 분들이죠. 회사가 굴러가게 하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예요. 반면 대단한 성취를 이뤘어도 인격은 엉망진창인 사람도 많이 봤어요. 결국은 전 업적보다는 역경 속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뭔가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존경스러워요. 어떤 상황에서든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서요."

그는 다시 한번 코난 오브라이언을 언급했다. 그가 다트머스 대학교 졸업 축사에서 했던 말. ‘사람은 누구나 이상을 위해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수백 번을 빗나간다. 그 결과 저마다 수백 가지의 고유함이 생긴다’는 메시지.

"코난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커리어에서 바닥을 치고도 다시 일어나요. 주변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엄청난 불이익을 감수하면서요. 그는 수모를 겪고 일어난 후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더 큰 믿음이 생겼어요. 계속 노력하고 주변에 선하게 하면 궁극적으로는 다 잘 될 거라는."

-일하면서 화가 날 때는 언제인가요?

"화도 폭력적인 기대에서 출발하잖아요. 내 생각대로 안 되면 화가 나는 거죠. 화의 화신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이 뭐지 아세요? "네가 어찌 감히 그럴 수 있느냐?"예요. 거기엔 ‘너는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는 폭력이 있죠. ‘나는 이렇게 희생했는데 너는 왜 맞추지 않느냐'는 거죠. 때론 저도 ‘잘해줘도 부질없네’ 이런 생각이 치고 들어올 때도 있죠(웃음). 하지만 안달복달하지 말자, 장기적으로 잘 되고 있다,고 믿습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사업은 무엇이지요?

"두손컴퍼니라고 노숙인들의 일자리를 주는 게 사업을 해요. 보통 노숙인들은 게으르고 효용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데 아니에요. 어떤 분은 10년 전 미국에서 HP에서 근무했던 경력을 살려서 IT 프로그램 개발을 해내시더라고요. 그걸 보고 정말 뿌듯했어요. 요즘엔 그분들이 마리몬드라고 위안부 할머니들이 만든 상품의 포장과 배송을 맡아서 하고 계세요."

-언제 행복합니까?

"아시다시피 행복은 일시적 고양감이라 집착하면 불행해져요. 지속가능한 감정이 아니라는 거죠. 1년 동안 고생하고 하루 행복하다면 얼마나 비효율적인가요(웃음). 저는 친구들과 두루 잘 지내고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와인 마시면 만족감이 커져요. 그런 정도의 만족을 지향하며 살죠."

-앞으로 어디에 더 많이 투자할 생각인가요?

"심리 건강 분야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어요. 예방적 의료 파트죠. 외국 사례를 봐도 의료비 지출의 대부분은 입원 후 연명 치료에요. 평소에 웰니스(wellness)에 투자해야 나중에 큰돈이 덜 듭니다. 교육 파트에도 집중하고 있어요. 건강한 자아를 지니려면 합리적인 양질의 교육이 시급해요. 아이 돌봄과 가족관계 서비스도 보고 있어요. 나쁜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도울 수 있는 투자를 계속해 나갈 거예요."

“인간의 가치가 쓸모에만 있지는 않아요.” 자유로운 동시에 맥락을 갖춘 정경선. 자기 삶을 객관화해서 해석의 힘을 갖춘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다.

그가 하는 일은 돈이 많이 드는 일이다. 재벌 3세라고 누가 돈을 호스로 공급해주는 것도 아니다. ‘편한 선택지'를 유보한 이후 그는 매력적인 독립체가 되었다. 현재 그가 세운 투자 회사 HGI는 사회 곳곳의 막힌 곳을 뚫어주는 임팩트투자를 확장하고 있다.

-최전선의 젊은 리더로 사는 게 외롭지는 않습니까?

"저는 야망이 커요. 루트임팩트가 체인지메이커들이 만드는 변화의 뿌리가 되겠다는 거죠(웃음). 알고 보면 겸손함을 가장한 오만함이 있다니까요. 하하하."

선민의식과 피해의식으로 자기분열을 겪고 있는 금수저들과 소멸된 자아로 무늬만 부자인 투명수저들 사이에서 정경선은 자아의 뿌리가 튼튼한 나무수저로 성장했다.

우리 사회의 부를 일군 자신의 뿌리를 기억하며, 동시에 그 스스로 사회적 자본의 건강한 뿌리가 되겠다는 정직한 야망. 새해 첫 달이 다 가기 전, 어둠이 아니라 빛을 보는 청년을 만나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