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윤 음식전문기자

평양냉면 집 '을지면옥'과 양대창 집 '양미옥', 소고기 집 '통일집'과 돼지갈비 집 '안성집' 등 서울 을지로를 오랫동안 지켜온 맛집들이 사라질 위기를 맞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이가 아쉬워하고 있다. 서울시가 추진해온 도심 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을지로 일대 재개발이 올 초부터 본격화하면서 철거가 시작됐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뒤늦게 "재개발 사업을 재검토하겠다"고 했지만 이미 사업 승인이 떨어진 지역은 보상 절차가 마무리되는 대로 철거할 수밖에 없다. 서울시는 낡은 건물을 밀어낸 자리에 새롭게 솟아오를 지상 30층 규모 '서밋타워'(주상 복합 건물) 입주를 권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노포(老鋪) 주인들과 단골들은 "어이없어 웃음이 나올 지경"이라 냉소(冷笑)한다. 맛이란 음식뿐 아니라 식당 특유의 분위기가 더해져 완성되는데, 그 분위기란 오랜 시간이 쌓여서 형성된다. 물리적으로 같은 자리라고 새 건물 냄새 폴폴 나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 식당에서 먹는 음식 맛이 같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분위기가 음식 맛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될까. 분위기가 음식에서 그렇게 중요할까. 그렇다면 분위기를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을까. 영국 옥스퍼드대학 찰스 스펜스(Spence) 교수는 "가능하다"고 믿는 정신물리학자이다.

그는 심리학과 인지과학·뇌과학·디자인·마케팅을 융합한 '가스트로피직스(gastrophysics)'라는 새로운 지식 분야를 창안했다. 가스트로피직스는 그가 미식학(gastronomy)과 물리학(physics)을 합성해 만든 신조어다. 지난 2017년 서울서 만난 스펜스 교수는 "음식은 혀가 아니라 뇌가 맛본다"며 "시각·청각·후각·촉각이 맛에 미치는 영향이 미각만큼 중요하다"고 했다.

"음악부터 조명까지, 그리고 향기부터 의자의 느낌까지 주변 환경은 식사 경험에 영향을 미칩니다. 뇌는 맛이 똑같은 음료라도 빨간색으로 물들이면 달게, 초록빛이 나게 하면 신맛이 난다고 인지합니다. 시끄러운 소리는 풍미를 덜 느끼게 합니다. 기내식이 맛없는 이유 중 하나죠. 높은 음조의 음악은 단맛을, 낮은 음조의 음악은 감칠맛과 쓴맛을 도드라지게 합니다. 같은 감자칩을 먹어도 '바삭' 소리가 클수록 실험자들은 더 신선하고 맛있다고 평가했습니다. 무거운 식기를 쓰면 더 고급스러운 음식으로 평가하며, 더 많은 돈을 낼 의향이 생긴다는 실험 결과도 있습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묵직한 포크와 나이프를 내는 이유죠."

세계적 요리사들은 맛은 음식을 먹는다는 총체적 경험의 일부일 뿐이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손으로 만지며 얻는 정보가 모두 더해져 빚어내는 분위기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본능적으로 타고났건, 요리 학교에서 배웠건, 오랜 경험을 통해 터득했건 말이다. 그래서 완벽한 맛은 기본이고 '그 밖의 모든 것'을 최적화하려 애쓴다.

프랑스 요리사 폴 페레(Pairet)가 중국 상하이에서 운영하는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 '울트라바이올렛(Ultraviolet)'이 가장 극단적인 사례다. 이 식당에서 테이블은 무대이고, 음식은 배우이며, 손님은 관객이다. 코스마다 각각 다른 배경 영상과 음악, 효과 음향이 펼쳐진다. '크런치 샐러드'가 나올 때는 천둥소리가 울려 아삭한 식감을 극대화하고, 프랑스식 스테이크에는 석양에 붉게 물든 파리 센강변 풍광 영상과 샹송 음악이 곁들여진다. 무려 2시간 30분에 걸쳐 20가지 음식이 나오지만 지루할 틈이 없다. 단순한 한 끼 식사가 아니라 한 편의 종합예술 공연이다. 손님들은 평생 기억에 남을 경험을 가슴에 안고 식당을 나온다.

오랜 시간 숙성된 노포의 분위기나 아우라(aura)는 아무리 뛰어난 요리사나 외식 기획자도 복제할 수 없는 귀한 자산이다. 물론 다시 분위기를 쌓기가 불가능하진 않다. 또 다른 냉면 명가이자 을지면옥 안주인의 언니가 운영하는 '필동면옥'은 원래 ㅁ 자 한옥이었다. "겨울철 절절 끓는 방바닥에 앉아 엉덩이 들썩거리며 차가운 국물과 면을 들이켜야 진짜 냉면 맛"이라고 이북 출신 어른들은 말했다. 1990년대던가, 한옥을 허물고 신식 2층 건물을 올린다고 했을 때 "이제 필동면옥은 끝났다"는 말이 많았다. 이제 그런 말 하는 이는 과거를 기억하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 말고는 거의 없다. 종로에서 강남 신사동으로 이전해 더욱 번창하는 '한일관'도 있다. 분위기란 하기 나름일 수도 있음을 필동면옥과 한일관은 보여준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라 을지로 재개발과 노포 철거를 걱정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