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그레스는 포르투갈의 남서쪽 끝에 있다. 북쪽에서 내려오든, 동쪽에서 나아가든 해안을 따라 사그레스로 가는 길은 아름답다. 서정(抒情)적이기보다는 서사(抒事)적이다. 웅장하고 운명적인 해안가의 아름다움은 사그레스에서 절정을 이룬다. 바다를 향해 튀어나온 모양새가 지브롤터와 비슷하다. 둘의 차이는 넓이와 높이. 사그레스는 지브롤터보다 훨씬 작다. 대신 전체적으로 높은 절벽 위에 있다. 그 좁고 높은 땅의 삼면을 바다가 휘감고 있다.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는 포말과 함께 포효하고, 저 멀리 펼쳐진 수평선은 바람과 더불어 침묵한다. 바다만이 연출할 수 있는 풍광이다. 이 바다는 지중해처럼 대륙 사이에 갇힌 바다가 아니다. 거꾸로, 대륙을 가둔 바다 대서양이다.

사그레스의 역사적 정체는 모호하다. 혹자는 이곳에 천문대와 항해 학교가 있었다고 한다. 혹자는 도서관이 있었고, 학교보다는 싱크탱크가 존재했다고 믿는다. 구체적인 기관이 존재했다기보다는 일종의 인적 네트워크가 있었고, 사그레스는 하나의 상징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기록이 없는 탓이다. 그럼에도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 하나 있다. 이곳이 '항해왕 엔히크'의 땅이었다는 것이다. 이곳을 토대로 엔히크는 바다를 향한 꿈을 키웠다. 대양을 개척했다. 사그레스로 들어오는 입구의 문장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곳에서 근대가 시작됐고, 유럽 문명의 세계화가 시작됐다.' 엔히크, 대항해시대를 열다

엔히크를 빼놓고 포르투갈의 역사를 얘기할 수 없다. 오늘의 세계를 설명할 수도 없다. 말 그대로 '역사적인' 인물이다. 우리에게 '항해왕'으로 알려진 엔히크(Henrique o Navegador·1394~ 1460)는 포르투갈의 왕족이었다. 아비스(Avis) 왕조의 개창자인 '대왕(大王)' 주앙 1세(Jo

ã

o Ⅰ 재위 1385~1433)와 잉글랜드계 왕비 랭커스터의 필리파(Filipa·1360~1415)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셋째였던 탓에 왕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중세 말(末)이라는 시대적 배경은 대신 왕자에게 기사(騎士)의 꿈을 심어줬다. 기회는 북아프리카의 전략적 요충지인 세우타(Ceuta) 정복전쟁과 함께 찾아왔다.(1415년)

항해왕 엔히크의 꿈이 무르익었던 사그레스는 높이 50m에 달하는 절벽 위에 위치해 있다. 하늘과 바다로만 이뤄진 이 외진 땅에서 엔히크는 한계를 넘고자 했다. 사그레스의 꿈은 엔히크 사후(死後) 50여 년이 지났을 때 포르투갈의 범선들이 인도와 믈라카해협을 지나 동남아 깊숙이에 자리 잡은 향로제도에 도달함으로써 이뤄졌다.

엔히크는 돌격대의 선두에 섰고 세우타 정복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무모할 정도의 용맹에 대한 보상은 명성과 작위. 아버지 주앙 1세는 5년이란 짧은 시간에 엔히크를 세우타 총독, 비제우(Viseu) 공작, 알가르브(Algarve) 총독, 그리스도 기사단 단장(1420년)에 연이어 임명했다.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몽상가였던 엔히크는 수도 리스본을 떠나 자신의 임지인 알가르브로 내려갔다. 그곳은 포르투갈 최남단의 낙후된 땅이었다. 그러나 엔히크는 세우타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바다'라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했다. 엔히크는 알가르브에서도 가장 끄트머리인 사그레스에 작은 성채를 세웠다. 퓰리처상을 받은 개릿 매팅리(Garret Mattingly) 컬럼비아대 교수는 엔히크의 연대기 작가인 주라라(Zurara)를 인용, 그 시기를 1419년으로 봤다. 그 누구도, 심지어 엔히크 본인조차도 상상하지 못했던 대항해 시대의 시작이었다.

포르투갈, 인식의 한계를 깨다

15세기 초 포르투갈은 폭발 직전이었다. 1411년 이웃나라 카스티야와의 평화조약은 왕국에는 평화를, 왕조에는 안정을 가져다줬다. 그러나 왕국을 세우고(1139년), 지키고, 키워온 전쟁 귀족들에게는 좋은 소식만은 아니었다. 평생 전사(戰士)로 살아온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증명할 곳이 필요했다. 무섭게 성장하는 상인 계층은 지중해의 변방이라는 한계를 깨고 싶어 했다. 지중해를 세상의 중심에 놓고 보면, 포르투갈은 서쪽 끝의 변방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동방에서 들어오는 향신료와 사치품들의 가격이 유럽 중심부에 비해 턱없이 높았다. 상인들은 새로운 교역로를 원했다. 포르투갈의 다른 주요 계층인 성직자들도 레콩키스타(재정복운동)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한 새 선교지를 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돌파구가 절실했다. 하지만 조국 포르투갈은 강력한 이웃인 카스티야와 바다 사이에 끼어 있었다. 카스티야와 평화조약을 맺은 건 그 나라가 넘을 수 없는 벽(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답은 바다일 수밖에 없었다.

항해왕 엔히크의 항해학교를 우의(寓意)적으로 표현한 벽화. 리스본 해양박물관의 전시실 입구를 장식하고 있다. 엔히크가 만든 기관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지만, 대항해 시대 초창기에 엔히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거의 이견이 없다.

유사 이래, 유럽인에게 대서양은 무지(無知)의 공간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무지는 공포를, 공포는 무지를 강화시켜왔다. 엔히크가 사그레스에서 한 첫째 작업은 무지를 깨트리는 것이었다. 그는 유럽 각지에서 우수한 지리학자, 천문학자, 수학자, 탐험가, 항해자, 항해기구 제작자 등을 모았다. 바다와 항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그렇게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체계적인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 결과는 목숨을 걸고 바다로 나아가는 엔히크의 선장들에게 제공됐다. 항해의 영역이 넓어졌고, 해류의 흐름과 바람에 대한 연구도 나날이 진척됐다. 엔히크의 사람들은 연구와 항해 경험을 토대로 배를 개량했다. 지중해와 달리 대서양은 노잡이에 의존해서 오갈 수 있는 바다가 아니었던 것이다. 돛대의 수를 늘리고, 거기에 거대한 삼각돛을 달았다. 초기의 대항해 시대를 주도할 카라벨(Caravel)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제 엔히크의 선장들은 인력에 의존하지 않고, 바람의 변화에 따라 돛을 움직여 손쉽게 배를 조정하게 됐다. 유럽이 지중해에 머물 때, 포르투갈만은 차근차근 세상의 바다를 정복할 준비를 해나갔던 것이다. '그 정복과 지식의 중심에 사그레스가 있었다.'(김명섭, 대서양문명사)

하늘에서 바라본 사그레스 전경(全景). 엔히크 시대의 건물들은 16세기 후반 잉글랜드 드레이크 경의 공격으로 사라졌고, 그 이후에 지어진 요새 건물들만이 남아 있다.

엔히크의 선장들은 쉴 새 없이 바다로 나아갔다. 당시 포르투갈에서 가장 부유했던 그리스도 기사단의 단장이었던 엔히크는 기사단의 막대한 부(富)를 바다 개척에 쏟아부었다. 마데이라, 아조레스가 발견되고 개척됐다. 몽상가였지만 냉철했던 엔히크는 '죽음의 곶'으로 알려진 보자도르(Bojador) 정복을 제1목표로 삼았다. 보자도르 곶은 유럽인들에게 세상의 끝이었다. 그곳을 넘어갔다 살아 돌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스스로 선(線)을 그었다. 엔히크는 선을 넘고자 했다. 1434년 선장 질 이아네스(Gil Eanes)가 보자도르 곶을 돌아 생환했다. 개량된 배가 곶을 지날 때 바뀌는 강한 해류와 바람을 이겨낸 것이다. 포르투갈은 그렇게 바다에 대한 무지를 깨고 공포를 극복했다. 인식의 혁명. 이제 유럽 변방의 작은 나라 포르투갈은 세상의 바다를 지배할 준비를 마쳤다. 탐험하고 개척하고 지배하다

사그레스는 오늘날 '요새'라 불리지만 남은 것은 별로 없다. 이제는 무용지물이 된 육중한 성벽과 바다를 향하고 있는 옛 대포들이 고작이다. 미국의 비영리 해양교육단체인 USPS가 '엔히크의 항해학교(School of Navigation)'를 기념해 설치한 동판만이 이곳의 역사를 상기시켜 준다. 사방이 바다인 이곳 사그레스에서 엔히크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내다봤을까? 돌이켜보면 바다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열려 있었다. 그러나 당시 역사 위에 군림하던 중국도, 인도도, 이슬람도, 그 누구도 열린 바다를 향해 나아가지 않았다. 풍요로운 그들은 만족했고 안주했다. 오직 포르투갈 사람들만이 엔히크를 필두로 바다로 나아갔다. 바다를 탐험했고, 개척했고, 지배하기 시작했다. 세계가 그들에게 찾아왔던 것이 아니란 얘기다. 그들이 세계로 나갔고, 세계를 쟁취했던 것이다. 역사의 반복은 필연(必然)이다. 우주개발과 관련된 뉴스가 하루가 멀다고 들려오는 오늘이다. 지금 모두에게 열린 미지의 공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결국 미래는 그들이 쟁취하게 될 것이다. 역사의 숙명이고 우리의 내일이다.

[엔히크가 바다로 간 까닭은?]

엔히크가 바다로 간 까닭은 무엇일까? 그가 처음부터 대항해시대를 열어 중세를 끝내고 근대를 열겠다는 목표를 세운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의도'가 아니라 '결과'였다. 엔히크는 철저한 중세인으로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새로운 교역로를 개척하겠다는 경제적인 목표와 더불어 기독교 신앙을 전파한다는 종교적 목표도 컸다. 특히 전설의 기독교 왕국의 군주 프레스터 존을 찾아 동맹을 맺고, 이슬람 제국을 상대로 십자군을 부활시키고자 하는 열망이 가장 컸다.

물론 그런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엔히크는 진정한 세계사의 주인공이 됐다. 의도보다 훨씬 크고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는 점에서 그는 역사의 행운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