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관, 달성 37호분 1곽, 국립대구박물관.

1923년 10월 23일 조선총독부 촉탁 노모리 켄(野守健) 일행은 대구 비산동과 내당동 일대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달성 남서쪽 여러 능선에 분포된 87기의 고분 중 6기가 대상이었다. 몇 달 전 땅 주인이 토사 채취를 목적으로 고분을 파괴하자 경찰서장은 토사 채취 중지를 명했고, 총독부 직원들이 고분 1기를 수습했다. 이어 땅 주인이 거듭 자신의 땅에 남아 있는 고분 발굴을 요청해 응한 것이다.

노모리 켄은 10월 27일부터 인부를 동원해 37호분 봉분을 파들어 갔다. 1주일 만에 석곽 윤곽을 확인하곤 서남쪽에 비스듬히 뉘어 있던 큼지막한 돌을 제거했다. 무덤 속은 어두컴컴했지만 도굴되지 않은 무덤임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석곽 안으로 들어가 유물을 확인해보려다 일몰 시각이 가까워져 철수했다.

11월 5일부터 내부 조사를 시작했다. 처음 진입한 서남쪽에는 토기, 마구와 함께 등불을 밝힐 때 쓴 철제 등울(등잔을 받치기 위해 만든 물건)이 놓여 있었다. 특히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2년 전 출토된 경주 금관총 금관과 비슷한 형태의 금동관 2점이었다. 무덤 주인공의 생전 지위를 알려주는 유물이다.

5기의 고분에 대한 조사도 함께 진행하였는데 발굴하는 고분마다 유물이 쏟아졌다. 경주에서나 나올 법한 화려한 귀금속 장신구와 각종 마구, 무기가 쏟아졌다. 발굴 결과 달성 고분군에 묻힌 사람들이 서기 5~6세기 무렵 대구 일원을 장악한 세력이었음을 잘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발굴은 달성 고분군에는 또 다른 상처가 됐다. 무덤에 수많은 유물이 묻혀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도굴범들의 표적이 된 것이다. 신라 신문왕이 천도를 계획할 만큼 지리적 조건이 좋아 강력한 세력들이 웅거했던 대구. 5~6세기 무렵 대구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던 핵심 고분군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근래 시가지 아래에 고분군 일부가 남아 있을 수도 있다는 견해가 제기됐다. 향후 체계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