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사역 칼부림' 현장 맨손 대치한 이명은씨
경찰이 제압할 거란 생각에 버텼지만...
커터칼 보고 소스라친 경찰, 3~4m 계속해서 뒷걸음질
경찰은 "동영상은 일부, 우리는 대응 잘했다"

지난 13일 오후 6시 50분 직장인 이명은(27·사진)씨는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암사역 3번 출구 앞을 지나던 도중 "악"하는 비명이 들렸다. 다가가보니 누군가 15cm길이 커터칼을 휘두르고 있었고, 그 앞에는 허벅지가 찔린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이른바 ‘암사역 칼부림’ 사건이다. 사건은 유튜브를 타고 삽시간에 번졌다.

유튜브로 공개되지 않은 장면이 있다.
"진정하세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명은 씨가 범인 한모(19)씨에게 다가가 팔을 잡은 순간이다.
횡설수설하던 범인 한씨는 이씨에게 "X발, 너 나와"라고 위협하더니, 흉기를 휘두르며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이씨는 손등에 2cm 길이의 상처를 입었다. 약 5분 가량의 대치상황이 억겁같이 느껴졌다. 이씨는 "경찰이 어서 와주기를 속으로 빌고 빌었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한 경찰들은 시민들이 보기엔 범인 앞에서 작아지는 모습이었다. 이씨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경찰이 도착했는데…보호받지 못하는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디지털편집국이 15일 이씨를 인터뷰했다.

ㅡ당시 상황을 담은 2분 13초 분량의 동영상이 올라왔다.
"사건 이후에야 집에서 동영상을 봤다. 영상의 53초쯤 등장하는 뒷모습이 바로 저다. 칼에 찔린 사람이 짓밟히고 있었는데 누구도 말리지 않는 상황이 비정상적으로 느껴져서 다가가 제지했다. 제가 살아오면서 이런 상황에서 뜯어말린 것이 열 번은 될 것 같다. 그래도 칼이 있었던 것은 처음이다. 대치하던 시간이 얼마 정도였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그 정도로 긴장했다."

ㅡ경찰이 제 때 도착했나
"시간을 재고 있지 않아서 그건 잘 모르겠다. 사람이 찔린 것을 보고 일단 말리러 간 거다. 누군가 112에 신고를 해주겠거니 생각했다. 기억으로는 범인과 대치한 것만 5분 이상이다. 너무 긴장한 탓에 체감하기로는 수십 분은 걸린 것 같다. (경찰에 따르면 최초 신고는 이날 오후 6시 57분에 접수됐다. 경찰은 4분만인 오후 7시 1분에 현장에 도착했다.)

ㅡ경찰의 '움찔 공권력' 논란이 일었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이제 됐다'고 생각했다. 맨 몸인 저 혼자서도 충분히 제지할 수 있었으니까. 두 명의 경찰관은 테이저건, 3단봉을 지니고 있었다. 무기를 든 경찰들이 몇 초 만에 제압하리라 생각했다. 처음에 범인에게 접근하던 경찰관이 이내 손에 쥔 커터칼을 보고 놀라는 눈치였다. 소스라치더니 적어도 3~4m는 뒷걸음질 쳤다. 누가 봐도 완전히 심하게 뒤로 갔다. 과장이 아니다. (경찰의 뒷걸음질이)하도 인상적이어서 그 장면만큼은 또렷이 기억난다. 3단봉을 펼친 경찰관도 계속 뒤로 물러섰다. 범인 주변에 시민들이 있었는데도… 그 다음 상황은 동영상과 같다. 테이저건을 쐈고 소용이 없었다. 범인이 담배를 피우면서 경찰들 겁을 줬다."

지난 13일 오후 7시쯤 ‘암사역 칼부림’ 피의자 한씨가 암사역 3번 출구 앞에서 커터칼을 든 채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ㅡ경찰이 제대로 대응했다고 생각하나
"누구보다 경찰을 기다렸던 사람으로서 못미더웠다. 경찰이 계속 머뭇거리자, 현장에 있던 시민들이 '도대체 왜 안 잡는거야'라면서 수군거릴 정도였다. 경찰은 결국 범인이 시민들 몰려있는 쪽으로 도망가도록 방치하지 않았나. 많은 시민들이 다칠뻔한 위험한 상황이었다. 다친 사람을 챙기거나, 목격자를 확보하는 모습도 안 보였다. 제 눈에는 그냥 어슬렁거리는 걸로 보였다. 제가 가장 가까이서 대치했던 사람이고 다치기까지 했는데 저한테 아무런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ㅡ당시 상황과, 경찰에 대한 실망감을 모교 커뮤니티(고파스)에 남겼다
"동영상만 보고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 나오니까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저는 나름대로 각오하고 말린 건데 희화화되는 것이 싫었다. 주변에서 동영상을 보고 '저거 혹시 너 아니냐'고 묻기도 했고…"

ㅡ비슷한 상황에 맞닥뜨리면 다시 말릴 것인가
"솔직히 고민된다. 경찰이 와주기만을 기다렸는데….이런 일을 겪고 나니까 경찰이 지켜줄 거라는 생각이 안 든다. 앞으로 비슷한 일이 생겼을 때 나설 수 있을지 망설여진다."

‘암사역 칼부림’ 사건 동영상을 접한 시민들은 "흉악범 앞에서 움츠러든 경찰의 모습에 충격 받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지난 14일 민갑룡 경찰청장은 ‘암사역 칼부림’ 부실제압 논란에 대해 "영상의 부분만 보면 경찰이 주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확인한 바로는 법 집행 절차대로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강동경찰서 천호지구대 측도 "동영상 잠깐만 보고 ‘왜 그리 오래 대치했냐’고 하시면 힘이 빠진다. 출동한 경찰이 대응을 잘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