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우 논설위원

미국 영화 '게임 체인저'에서 나이지리아 출신 의사인 주인공은 정신이상으로 자살한 미식축구 스타의 시신을 부검한다. 뇌를 해부해보니 평생 미식축구를 하며 뇌진탕에 해당하는 충격을 7만번이나 받아 엉망진창이었다. 이어 전직 선수들이 줄줄이 정신이상으로 자살하고, 그들의 뇌도 똑같은 병변이 있음을 밝혀낸다. 이 연구 결과를 발표하자 미식축구협회(NFL)가 발칵 뒤집힌다. 미국 최고 인기 스포츠의 존망(存亡)을 좌우할 수 있는 논문이기 때문이다.

NFL 측은 주인공에게 "우리는 수십만 일자리를 만들었고 수많은 아이에게 장학금을 줬으며, 무엇보다 미식축구는 서민들의 희망"이라며 "아프리카 출신으로 부검이나 하는 돌팔이가 미식축구에 대해 뭘 안다고 떠드느냐"고 다그친다. 논문을 취소하라는 것이다. 급기야 FBI가 그의 상사를 '사무실 팩스 사적 이용' 따위의 혐의로 기소하고 주인공에게도 "무엇이든 걸어 잡아넣을 수 있다"고 협박한다.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는커녕 추방 위기에 놓인 주인공은 "차라리 진실을 몰랐더라면, 알더라도 말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자책한다.

지난 주말,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이 영화를 TV에서 보며 신재민의 폭로를 떠올렸다. 그는 정부의 KT&G 사장 인사 개입과 적자 국채 발행 시도를 폭로했다. 업무 현장에서 직접 지시받고 겪은 일이었다. 민간 기업 인사에 왜 정부가 개입하며, 돈이 있는데 왜 나랏빚을 늘리느냐는 지극히 상식적인 문제 제기였다.

이를 두고 대통령은 "자기가 보는 좁은 세계 속의 일을 가지고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라며 "정책 결정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이뤄진다"고 말했다. 여당 대표는 "조직에 잘 적응하지 못한 사람"이라며 "사무관이 보는 시야와 고위 공무원의 시야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 여당 의원은 '사기꾼' '나쁜 머리' '양아치'라고 들씌웠다. 기획재정부는 공무상 비밀을 누설했다며 그를 고발했다.

미식축구 선수가 뇌 손상에 따른 정신이상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좁은 세계(연구실)의 폭로가 미식축구라는 스포츠 자체를 뒤흔들었다. 그러자 "미식축구는 일개 부검의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아프리카 돌팔이'를 수사하겠다는 협박도 이어졌다. 2000년대 초 미국에서 일어난 이 일과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은 본질적으로 아무 차이도 없다.

신재민이 '정무적 판단'으로 '좁은 세계'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침묵했다면, 국민은 민간 기업 사장 인사에 정부가 어떤 식으로 개입했는지 알 수 없었다. 세금을 넘치게 걷어놓고 빚을 오히려 늘리려 한 것도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다. 이것이 걸핏하면 "단언컨대" "단 한 건도" "전혀" 잘못하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정부의 일 처리 방식이다. 대통령이 얼마나 넓은 세계의 안목과 판단으로 정책을 결정하는지 모른다. 그 세계가 얼마나 복잡한 과정으로 얽혀있는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의혹에 대한 해명은 없고 '아랫사람이 생각 없이 행동한 것'이란 타박만 남았다는 사실은 안다.

우리 대부분은 신재민처럼 좁은 세계에 살고 있다. 월급쟁이, 자영업자, 소상공인으로 일하며 나와 내 가족, 내가 고용한 직원을 먹여 살려야 하는 작고 볼품없는 세계다. 사람들이 먹고살기 힘들다고 아무리 아우성쳐도 저 높은 세계의 권력은 꿈쩍하지 않는다. 국민을 "좁은 세계 속의 일로 문제가 있다고 하는" "조직에 잘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로 생각하는 것 같다. 영화를 보다가 숨 막힐 듯 답답해진 이유가 거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