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4년 병색이 완연한 초로의 여인이 와카야마(和歌山)현에 있는 의사 하나오카 세이슈(華岡靑洲)를 찾는다. 여인은 젖가슴의 병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의사마다 고개를 젓더라는 절망을 호소하는 여인을 진찰한 하나오카는 여인의 병이 유방암임을 알아차린다. 당시 의술로는 치료가 불가능한 병이었다. 하나오카가 죽을 수도 있는 어려운 치료임을 알리지만, 여인은 치료를 간청한다. 여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치료란 유방을 절제하여 암을 도려내고 상처를 봉합하는 외과수술이었다. 워낙 말기 상태라 여인은 4개월 후 사망했으나 수술 자체는 성공이었다. 사실 이 수술은 의학사(史)에 남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최초의 전신마취 수술이기 때문이다. 1846년 하버드대의 존 워런이 에테르를 사용하여 집도한 서양 최초의 전신마취 수술보다도 40년 이상 앞선 것이었다.

하나오카는 교토(京都) 유학 시절 나가사키의 서양 의사들이 전수한 절개, 절제, 봉합 등 외과술을 접하고 그를 집중적으로 연마한다. 그러나 귀향하여 의원을 운영하던 그는 좌절에 빠진다. 외과 치료를 받는 환자의 고통이 너무 커서 제대로 치료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통을 경감할 수 있는 약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그 개발에 일생을 바친다.

20년이 넘는 시행착오 끝에 그는 ‘통선산(通仙散)’이라는 마취약 개발에 성공한다. 여인의 수술은 통선산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통선산은 하나오카 개인에게는 너무나 아픈 약이었다. 현대 마취약도 마찬가지지만 통선산은 투약 분량에 따라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 임상시험을 하지 못해 애를 태우던 그에게 가족이 실험 대상을 자청했고, 그 후유증으로 모친이 목숨을 잃고 아내가 실명하는 비극이 발생한다. 그 희생은 헛되지 않아 하나오카의 의술은 널리 전해져 많은 인명을 구하는 데 기여했다. 인명을 다루는 이들의 헌신과 자기희생에 감사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