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이 7일(현지 시각) 재임 기간 중 처음으로 재판에 불참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민주·공화 양당은 물론이고 미국 사회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인 1993년 대법관에 취임해 26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가 법정 구두 변론에 빠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케이시 아르버그 연방대법원 대변인은 이날 성명에서 "작년 말 폐암 수술을 받은 긴즈버그는 현재 자택에서 회복 중"이라며 "앞으로 재택 근무를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긴즈버그에게 문제가 생기면 미 정부 정책과 사회·문화 규범의 방향키를 쥔 대법원의 이념 균형이 심각하게 무너진다. 미 대법원은 보수 성향 대법관 5명과 긴즈버그를 포함한 진보 성향 대법관 4명이 포진한 구도이기 때문이다. 작년 11월 긴즈버그가 낙상해 갈비뼈 3개가 부러지는 골절상을 입었을 때 온라인에는 "당신은 (트럼프의 재선까지 감안해) 5년간 절대 죽으면 안 됩니다" "내 수명의 몇 년을 떼 드릴게요" "갈비뼈는 물론 콩팥까지 기증할 수 있습니다"라는 글들이 올라왔을 정도다.

'RBG'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이 지난 2010년 10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열린 여성 단체 회의 '위민스 콘퍼런스'에서 미소 짓고 있다. 키는 155㎝에 불과하고 작년 폐암 수술 이후 자택에서 회복 중인 이 85세의 할머니는 최근 자신의 삶을 그린 전기 영화 '온더 베이시스 오브 섹스'가 개봉하면서 아이돌 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끌고 있다.

긴즈버그의 건강 문제뿐 아니라 요즘 미국 사회는 키 155㎝에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쓴 이 왜소한 85세 할머니에게 열광하고 있다. 그는 이름 앞글자를 따서 'RBG'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아이돌 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가 "RBG는 이 시대의 밈(meme·유전이 아니라 모방을 통해 습득되는 문화 요소)"이라고 평하고, 폴리티코는 "RBG 컬트(특정 대상에 열광하는 문화 현상)"라고 언급할 정도다.

'RBG 열풍'의 기폭제가 된 것은 지난달 25일 미국에서 개봉한 전기 영화 '온 더 베이시스 오브 섹스(On the Basis of Sex)'다. 긴즈버그의 젊은 시절을 다룬 이 영화에서 그는 불굴의 투지와 강인함을 가진 여성으로 그려진다. 1956년 긴즈버그가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했을 당시, 500명의 학생 중 여학생은 그를 포함해 9명뿐이었다. 그는 여자 화장실조차 없을 정도로 남성 위주인 학교에서 '얼룩' 취급을 받았다. 긴즈버그는 로스쿨 선배인 남편이 고환암에 걸리자 병간호와 집안일, 어린 딸 양육을 혼자 감당하면서도 남편 대신 수업에 들어가 노트 필기를 하고 새벽까지 남편이 불러주는 에세이를 타이핑해 주면서 자신의 공부를 병행하는 초인적인 투지를 보여준다.

영화는 졸업 후에도 성차별을 받던 긴즈버그가 1972년 '찰스 모리츠 사건' 변호를 맡아 남녀 차별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이끌어내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남자 모리츠는 홀로 병든 어머니를 돌봤는데, 그 비용에 대한 세금 공제를 받을 수가 없었다. '병든 사람이나 환자를 돌보는 것은 여성이 하는 일'이라는 통념 때문에 당시 세법은 환자를 돌보는 과부, 이혼녀 등 여성에게만 세금 공제를 했기 때문이다. 긴즈버그는 이 법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이끌어내 남녀가 법적으로 평등하다는 판례를 만들었다.

영화 속의 강한 페미니즘 색채도 긴즈버그가 여성들 사이에서 '걸 크러시(Girl Crush·여자도 반할 멋진 여자)'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하며 인기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는 요인 중 하나다. 각본을 쓴 대니얼 스티플먼은 긴즈버그를 가리켜 "이 시대의 선구적인 페미니스트"라고 표현했다.

사실 긴즈버그의 대중적 인기는 새로운 것은 아니다. 판사 시절 여성·성 소수자·이민자와 저소득층 편에 선 판결을 통해 '진보의 아이콘'으로 밀레니얼 세대와 진보층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2005년 나온 전기 '악명 높은 RBG(Notorious RBG)' 제목에서 따온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 머그컵 등이 불티나게 팔리고, 법복에 레이스 칼라와 장갑을 매치한 '긴즈버그 스타일'도 유행이다. 작년 5월엔 CNN 필름이 다큐멘터리 'RBG'도 제작·방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