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바보가 언덕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네 / 머리에 붙은 눈에는 세상이 회전하고 있다지(But the fool on the hill sees the sun going down and the eyes in his head see the world spinning round)'(비틀스, 'The Fool on the Hill(언덕 위의 바보)', 1967)

그랬다. 세상 사람이 별들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우기던 그때, 바보 하나가 언덕 위에 서서 지구가 돈다고 선언하고 죽었다. 바보 이름은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다.

대항해의 시대와 코페르니쿠스

1473년 2월 19일 오전 4시 48분 폴란드 북부 상업도시 토룬(Torun)에 사는 부유한 상인 코페르니크(Kopernik) 집안에 네 번째 아들이 태어났다. 아버지 이름을 따서 이름은 미코와이(Mikolai)라 지었다. '코페르니크'는 구리업자라는 뜻이다. 훗날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미코와이는 라틴어로 이름을 바꿨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라고 했다.

코페르니쿠스 고향인 폴란드 토룬(Torun) 시청(사진 오른쪽) 앞에는 그를 기리는 동상이 서 있다. 시청은 박물관으로 바뀌었고, 세상은 혁명적으로 변했다. 1543년 그가 내놓은 논문 한 편이 지구를 움직였고, 탐험과 과학기술로 무장한 유럽이 중세의 암흑기를 뛰쳐나와 세계사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세상은 격변 중이었다. 1453년 오스만튀르크제국이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지중해 동쪽 무역로를 장악했다. 유럽 땅끝 나라 포르투갈은 일찌감치 대서양 항로를 찾아 나섰고, 스페인을 비롯한 여타 제국(諸國)도 대서양으로 배를 띄웠다.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이끄는 포르투갈 함대가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에 도착했다. 또 10년이 지난 1498년 바스쿠 다가마 함대가 인도 서부 코지코드에 도착했다. 속칭 대항해의 시대였다. 목적은 돈, 부귀영화였다.

1450년 독일 마인츠의 인쇄업자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기독교 성서를 인쇄했다. 인쇄기는 포도주를 짜는 압착기를 개조해 만들었다. 손으로 써내려간 값비싼 양피지 책보다 싸고 대량 인쇄가 가능했다. 구텐베르크는 "이 종이를 사면 죄를 용서받고 천당 간다"며 교회에서 신도에게 팔던 '면죄부(免罪符)'도 대량으로 찍었다. 구텐베르크는 동업자와 불화에 스트레스를 받고 실명(失明)하고 죽었다. 1517년 독일 성직자 마르틴 루터가 면죄부를 팔아치우는 교회를 비판하며 종교 개혁을 선언했다. 루터의 선언문 또한 인쇄술로 2주 만에 유럽 전역으로 전파됐다. 그 요동치는 역사 속에서 상인 아들 미코와이는 폴란드 크라쿠프, 이탈리아 볼로냐, 파도바, 페라라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신학과 법학과 천문학과 수학과 의학을 공부했다. 공부를 하다 보니, 뭔가 이상한 것이다.

깜깜한 세상 숨막히는 지구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 프랑스 알사스 스트라스부르 성당 천문시계에 있는 초상화(1570년대)를 1989년 복원한 그림이다. 자화상을 토대로 그린, 가장 오래된 초상화다.

대학에서 상인 아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배웠다. 신이 부여한 질서에 따라 우주가 움직이고 신이 그 우주를 관리한다고 배웠다. 예술도 철학도 천문학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든 성채 속에 완성돼 있었다. 교수가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르치면 학생들은 그 주석을 달았다.

대학에서는 또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배웠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어받은 프톨레마이오스는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가 돈다고 주장했다. 하느님이 창조한 세계를 표현하는 데 최적의 우주관이었다. 그의 천동설은 중세 이래 유럽 지성이 허용하는 유일한 우주관이며 세계관이었다. '땅은 영원히 있도다(Terra autem in aeternum).'(전도서 1장 4절) 성경에 오류는 있을 수 없었다. 모든 학문은 성경과 아리스토텔레스 원전(原典)과 그 주석(註釋)의 합을 넘어서지 못했다.

코페르니쿠스 지구를 움직이다

그런데 이 상인 아들이 밤하늘을 관찰하니, 별들이 천동설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화성은 왜 가끔 진행 방향을 바꾸는 것이며, 왜 수성과 금성은 항상 태양 가까이 있는 것인가. 프톨레마이오스에 따르면 복잡하고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기원전 45년 천동설에 근거해 만든 율리우스 달력은 이미 현실과 열흘 차이가 나 있었다.(바바라 서머빌, '근대 천문학의 아버지, 코페르니쿠스', 2005)

그리하여 코페르니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심원만으로도,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심원으로도 별들의 운동을 완전히 증명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코페르니쿠스,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서문, 1543) 죽을 때까지 성직자였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만사에 면밀하기 짝이 없는 철학자들이 만물의 창조주가 인간을 위해 창조한 우주의 작동 방식에 일치된 이론이 없다는 사실에 구역질이 났다."('천구의 회전' 서문) 하여, 코페르니쿠스는 땅과 하늘의 자리를 바꿔버렸다. 지구를 움직이게 하면 모든 천체 현상이 신의 섭리에 맞게 너무나도 간단하게 설명이 되는 것이다. 하늘과 지구의 위치를 바꾼 이 발상을 과학사가들은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라고 명명했다. 이후 탐험과 과학으로 무장한 유럽은 세계사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지동설 출판과 반발

1510년 폴란드 북부 프롬보르크성당 행정관으로 일할 때 코페르니쿠스는 이 같은 생각을 정리한 40페이지짜리 '짧은 해설서(Commentariolus)'를 동료 지식인들에게 돌렸다. 지구가 우주 중심이 아니라는, 그렇게 해야만 단순하고 아름다운 우주가 된다는 그 생각에 많은 지식인이 호응했다. 1533년 교황청 추기경 폰 쇤베르크는 이 시골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 출판을 재촉하기도 했다. 완성된 논문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는 10년 뒤인 1543년에 나왔다. '짧은 해설서'를 읽은 천문학자 예르지 레티크(Jerzy Retyk)가 강력하게 진행해 가능했다. 저자가 뇌출혈로 의식불명에 빠진 동안 책은 독일 뉘른베르크에 있는 금속활자 인쇄소에서 인쇄됐다. 인쇄 완료는 3월 21일(추정)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책을 보지 못하고 5월 24일 프롬보르크에서 죽었다. 유해는 성당 기둥 아래 묻혔다.

'땅은 영원히 있도다(Terra autem in aeternum)'라는 기독교 성경 구절(전도서 1장 4절)에 묶였던 유럽은 코페르니쿠스로 인해 해방됐다. 토룬에 있는 그의 동상 기단(오른쪽)에는 '토룬의 사나이, 땅을 움직이고 태양과 하늘을 멈춘 자(Thorunensis Terrae motor solis caelique stator)'라고 새겨져 있다.

중간에 인쇄를 감독한 루터파 목사 오시안더는 저자 허락 없이 원제목인 '세계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mundi)'의 '세계(orbium mundi)'를 '천구(orbium coelestium)'로 바꾸고 '수많은 가설 중 하나일 뿐'이라는 서문을 삽입했다. 분노한 레티크는 자기가 받은 책 표지의 '천구'를 붉은 잉크로 칠해버렸다. 이 책은 스웨덴 웁살라대학에 보관돼 있다.(한스 블루멘버그, '코페르니쿠스 세계의 기원', 1987)

1571년 교황청은 금서성(禁書省)을 설립했다. 들불처럼 번지는 권위에의 도전을 막기 위함이다. 1600년 지구가 돈다고 주장했던 이탈리아 철학자 브루노가 화형당했다. 1633년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관찰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입증한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을 받았다.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다시는 주장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석방됐다. 1948년 32판까지 나온 금서 목록에는 4000권이 넘는 책이 실렸다. 하지만 이미 지구는 움직이고 있었다. 1966년 6월 14일 교황청은 결국 금서목록을 도덕적 목록에 불과하다고 선언했다. 목록에는 개신교 성경, 루소, 스피노자, 칸트, 볼테르의 책이 있고 다윈의 책, 마르크스의 책, 히틀러의 책은 없었다.

그가 지구를 움직인 이유는

1992년 10월 31일 264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오를 복권시켰다. 갈릴레오 재판 359년 만이었다. 2005년 프롬보르크 성당 기둥 아래에서 부서진 해골이 발견됐다. 이후 유럽 전역에서 모든 분야의 과학자가 총집합해 유골 주인이 코페르니쿠스임을 밝혀냈다. 과학 혁명의 씨앗을 뿌린 선배를 그 후배들이 찾아냈다. 자기가 지구를 움직인 이유를, 코페르니쿠스는 스스로 증명한 것이다. 2010년 5월 22일 코페르니쿠스는 눈감은 지 467년 만에 장례식을 치르고 땅으로 돌아갔다.

폴란드 프롬보르크 성당에 있는 코페르니쿠스 무덤(왼쪽 검은 기둥 앞 바닥). 지난 2005년 발견돼 사후 467년 만인 2010년 5월 22일 정식으로 장례식이 치러졌다. 유해 발굴과 신원 파악에는 그가 씨앗을 뿌렸던 과학기술이 총동원됐다.

불멸의 혁명가가 죽고 넉달 뒤 아시아의 동쪽 끝 일본에 유럽의 서쪽 끝 포르투갈인이 상륙했다. 세상은 하나로 묶이고 있었고, 또 다른 혁명이 예고돼 있었다.

〈글 싣는 순서〉

1. 1543년 무슨 일이 벌어졌나
2. 1543년 지구가 움직였다
3. 1543년 일본, 총을 손에 넣다
4. 1543년 조선, 서원을 열었다
5. 세종, 천재의 시대와 칠정산역법
6. 이와미은광과 조선인 김감불
7. 전국시대의 통일과 임진왜란
8. 성리학과 란가쿠(蘭學)
9. 무본억말(務本抑末)과 조선 도공
10. 1852년 고종과 메이지 태어나다
11. 메이지유신과 대한제국
12. 기적의 대한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