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싱가포르 난양이공대 의대 실험실. 10여 명의 학생들이 머리에 VR(가상현실) 기기를 쓰고 인체 해부학 실습을 하고 있었다. 사람 장기가 아닌 VR 화면에 나오는 3D(입체) 심장 영상을 손으로 조작하는 방식이다. 공대에서도 VR과 같은 첨단 기기를 수업에 활용한다. 손에 기름을 묻히지 않고 항공기 터빈 엔진 속을 들여다본다. 병원과 기업에서 사용하는 방식을 대학 교육 현장에 들여온 것이다.

난양이공대 의대생이 VR(가상현실) 기기에 나오는 영상을 보며 팔꿈치 관절 수술 연습을 하고 있다. 난양이공대에서는 VR과 같은 첨단 기기를 수업에 이용한다.

생명과학센터의 바이오합성 실험실에서는 바이오 3D 프린터를 이용한 오가노이드(실험용 미니 장기) 제작이 한창이었다. 프린터에 유기물을 주입하자 미리 입력된 프로그램에 따라 기계 팔이 움직이면서 손톱 크기만 한 위 오가노이드를 만들었다. 오가노이드는 동물을 대신해 신약 후보 물질 독성을 테스트할 수 있고 향후 인공 장기 개발로도 이어질 수 있다. 바이오 산업에서 각광받는 첨단 기술이다.

난양이공대에선 강단 수업보다 이런 실용적인 장면이 자주 눈에 들어온다. 이 학교도 처음엔 학부생 교육을 주로 하는 '티칭 학교'에 가까웠다. 그러다 2007년 노벨화학위원회 대표를 역임한 스웨덴 출신 베르틸 안데르손 박사를 부총장으로 영입하면서 180도 바뀌었다. 2011년 총장에 오른 그는 재임 기간 교수 연구 성과가 낮은 대학 교수 30%를 잘라내고 교수직 테뉴어(정년 보장) 심사를 미국보다 엄격하게 바꿨다. 일정 기간마다 연구 성과를 평가받아야 하는 비(非)정규직 교수 비율을 70%까지 높였다.

구조 조정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아무리 유명한 석학이라도 성과가 저조하면 4년 이상 버티기 힘들다. 교수는 임용 4년 뒤 해외 학자로 구성된 정부 평가위원회로부터 연구 성과를 심사받고 재임용이 결정된다. 재임용이 결정돼도 3년 후 2차 심사를 통과하지 못하면 학교를 떠나야 한다. 이런 식으로 매년 평균 100명의 교수들이 바뀐다.

그럼에도 난양이공대는 파격적인 연구비 지원과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글로벌 환경의 이점을 앞세워 인재를 빨아들이고 있다. 난양이공대는 성과가 뛰어난 1등급 연구자에게 연 40억~50억원의 연구비를 인센티브로 지급한다. 인공지능(AI), 바이오 분야에서 재능 있는 30·40대 젊은 연구자를 끌어모으기 위해 연봉과 별도로 1년에 1억5000만원 상당의 연구비를 주고 있다. 지난해 시범적으로 교수·연구원 12명을 뽑았는데 공고 6주 만에 30국에서 538명이 몰렸다. 올해부터 5년간 70명씩 총 350명을 뽑고 석좌교수도 100명 더 선발할 계획이다.

다국적 기업이 다수 싱가포르에 법인을 두고 있다는 점도 우수 교수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싱가포르의 다국적 기업은 지난해 기준 3800여 개로 홍콩(1400개), 상하이(470개)를 크게 앞선다. 난양이공대는 2010년부터 교내에 글로벌 기업 연구소를 유치해 대학교수와 공동 연구를 하는 '코퍼레이션 랩'을 운영하고 있다. 학교에서 기업이 필요한 기술에 적합한 연구자를 찾아 연결해주고 부가가치가 높은 기술 연구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알리바바의 인공지능 연구소, HP의 3D 프린터 연구소를 비롯해 총 180개 기업 연구소를 유치했다. 바이오폴리스 등 싱가포르 정부 주도로 조성된 3곳의 바이오 클러스터에도 머크·화이자·노바티스 등 40여 글로벌 제약사의 연구소가 입주해 난양이공대와 공동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