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가의 탄생

그레그 스타인메츠 지음|노승영 옮김|부키|384쪽|1만8000원

1523년 어느 봄날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출신의 은행가 야코프 푸거(1459~1525)는 필경사를 불러 독촉장을 받아 적게 했다. 고객 1명이 채무 상환을 연체하고 있었다. 푸거는 늘 독촉장을 써 왔지만 이날의 독촉장이 특별한 이유는 수신인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자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카를을 신으로 숭배했으며, 그를 만지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다.

그러나 푸거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돈 앞에선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믿었다. 황제든, 귀족이든, 교황이든 빚을 졌으면 갚아야 하는 동등한 인간일 뿐이었다. 카를 5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푸거로부터 빌렸다. 황제는 채무자였고, 자신은 평민 출신이지만 채권자였다. 이 관계에서 힘을 가진 사람은 채권자다. 신분제가 공고했던 당시로선 불온한 생각이었다.

저널리스트 출신 미국인 증권 분석가가 쓴 이 책은 모든 사람에겐 자기 자리가 있다는 중세적 사고방식을 부정하고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라 믿었던 르네상스 신인류, 푸거의 일생을 다룬다. 원제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The Richest Man Who Ever Lived)'. 1525년 세상을 떠났을 때 푸거의 재산은 유럽 내 총생산의 2%에 육박했다. 그는 역사책에 기록된 최초의 백만장자로, '독일의 록펠러'라 불린다.

가업은 직물 매매였지만 푸거가 큰돈을 번 것은 대부업을 통해서였다. 그는 종종 돈을 빌려주고 이자 대신 광산 채굴권 같은 권리를 받았다. 유럽 최대의 은광도시 오스트리아 슈바츠의 지기스문트 대공에게 돈을 빌려주고 막대한 양의 은을 손에 넣었고, 헝가리로 넘어가 구리 광산을 매입, 16세기 전쟁의 핵심인 대포와 소총의 주원료인 구리 사업에 뛰어든다.

큰 사진은 독일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푸거 초상화. 푸거는 근대적 자본주의의 문을 연 인물로 평가받는다. 작은 사진은 푸거가 도시 빈민을 위해 지은 공공주택 ‘푸거라이’.

역사상 처음으로 돈이 전쟁과 정치를 좌우하는 시대였다. 푸거는 금력을 십분 활용했다. 교회는 고리대금업을 금하고 있었지만, 푸거는 신학자들을 움직여 성서 해석을 바꾸고, 교황을 설득해 대금업을 합법화했다. 저자는 "우리가 집을 사거나 차를 빌리거나 예금 이자를 받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할 사람이 딱 한 명 있다면 푸거"라고 말한다.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긴 것도 푸거였다. 1514년 푸거는 마인츠 대주교 자리를 노리던 호엔촐레른 가문의 후손 알브레히트에게 성직 매입 대금을 빌려준다. 이 돈을 갚기 위해 알브레히트는 면죄부 판매 아이디어를 내고, 교황이 이를 실행한 데 격분한 마르틴 루터는 면죄부에 반대하는 95개 조항을 작성한다.

푸거는 광부들을 혹독하게 부렸고, 이는 고스란히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노동자 시위가 빈번했고 독일 농민전쟁 때도 표적이 됐다. 그러나 푸거는 당당했다. "많은 사람이 내게 적대적이다. 하지만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부자가 되었다"고 했다.

냉혹한 자본가에게도 사회 환원의 개념은 있었다. 현재 아우크스부르크 최고의 명소인 '푸거라이'는 도시 노동빈민을 위한 공공임대주택이다. 모두 106채로, 5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어 당시 유럽 최대 규모의 빈민구호소였다. 푸거는 집을 공짜로 내어주지 않았다. 1년에 1플로린을 받았는데, 푸거의 공장에서 일하는 방직공의 6주 급료였다. 푸거는 가난한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눴다. 날품팔이꾼은 동정과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었지만, 거지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모든 사람에게 노동의 의무가 있다는 것이 푸거의 신념이었다.

탄탄한 취재를 바탕으로 아주 잘 쓴 평전으로, 열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성직자로 키워지던 소년이 자본가로서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나가는 여정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탐욕스럽고 부(富)만을 좇은 이 사내의 이야기를 왜 굳이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저자는 이렇게 답한다. "푸거는 고도로 창의적인 상호주의를 구현하는 자본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일자리를 창출하고 소비 수요를 충족하며 진보에 박차를 가했다. 그를 추동한 정신은 사람들이 의약품과 백신을 개발하고 고층 건물을 지으며 성능이 더욱 뛰어난 컴퓨터를 발명하도록 추동한 정신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