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서울역에 무료 커피숍이 열렸다…'커피사회' 전시 개최
제비다방부터 자판기 커피까지, 근현대 커피 문화사 조명

커피 원두가 깔린 ‘방’, 백현진. 원두를 밟고 만지며 놀 수 있다.

"나는 그래도 경성역을 찾아갔다. 빈자리와 마주 앉아서 이 쓰디쓴 입맛을 거두기 위하여 무엇으로나 입가심을 하고 싶었다. 커피! 좋다." – 이상 ‘날개’(1936)

커피 없는 하루를 상상할 수 있을까? 사무실에선 종일 커피를 달고 살고, 주말엔 분위기 좋은 카페에 가서 시간을 보낸다. 심지어 카페 투어를 위해 해외여행을 떠나는 이들도 있다. 커피는 언제부터 우리 생활을 잠식했을까?

해답을 찾기 위해 옛 서울역(문화역서울284)을 찾았다. 국내 커피 문화의 변천사를 돌아보고,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무료 커피숍’이 열렸기 때문이다. ‘커피사회’라고 명명된 이 전시는 19세기 말 국내에 들어온 이래, 1930년대 다방을 시작으로 찻집, 카페로 진화해 온 커피문화를 돌아보는 내용으로 구성됐다.

◇ 티켓 대신 커피 컵…그 시절 문인처럼, 커피에 취해볼까

중앙 로비에 들어서자 관계자가 티켓 대신 종이컵을 준다. 이 컵으로 전시장 곳곳에 마련된 카페에서 커피를 받아 마실 수 있다.

1·2등 대합실 티룸에서 커피문화 체험을 시작했다. 제비다방, 낙랑팔러 등 커피 도입 후 활성화됐던 근대의 다방들을 돌아보는 시간이다. 1920년대 후반 설립된 다방은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공간이 아니라, 문화예술 교류의 장이었다. 제비다방은 이상이 운영했던 다방이고, 낙랑팔러는 이상, 박태원 등이 속했던 모더니즘 단체 구인회 동인들이 모이던 곳이다.

1·2등 대합실 티룸에서 전시된 ‘제비다방과 예술가들의 질주’. 문헌을 통해 근대 커피문화를 엿보는 공간이다.

이곳에선 당시 문헌을 통해 근대 커피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데, 지금 봐도 공감 가는 내용이 많다. 예컨대 박태원이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서는 실업자 청년 구보가 머무르는 공간으로 다방이 묘사됐다. "다방의 오후 두 시, 일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그곳 등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담배를 태우고, 이야기를 하고, 또 레코드를 들었다. 그들은 거의 다 젊은이들이었고, 그 젊은이들은 그 젊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기네들은 인생에 피로한 것 같이 느꼈다." 어쩐지 오늘날 커피 체인점에서 노트북과 책을 두고 공부하는 청년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역장실의 ‘다방이야기’에서는 일제강점기 민간인이 지은 첫 다방인 ‘카카듀’부터 다방의 르네상스기였던 50년대 명동 다방과 70년대 청년문화, 90년대 수입 브랜드 커피 체인점까지의 흐름을 짚었다. 특히 영화 속 다방 신을 엮은 작품이 눈길을 끈다. ‘검사와 여선생’(1948), ‘벽 속의 여자’(1969),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철수와 만수’(1998) 등에 나온 다방 장면을 연이어 보여주는데, 시대는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발견됐다. "왜 다방엔 어항이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다방을 이용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모은 ‘다방 인터뷰 프로젝트’에서 찾을 수 있었다. 영상에서 김창겸 작가는 "다방이 보통 지하에 있었는데, 공간이 어둡고 답답하니 밝고 살아있는 분위기를 내려고 어항과 큰 거울을 설치한 것 같다"고 말했다.

◇ 현대의 바리스타가 만든 ‘근대의 맛’은?

커피를 체험하고 시음할 수 있는 공간도 구성됐다. 커피 원두를 바닥에 깔아 놓은 ‘방’에선 원두를 밟고 만지며 향긋한 커피 향을 즐길 수 있다. 신발을 신고 뽀드득뽀드득 원두를 밟다보니, 동심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그릴’에 마련된 ‘근대의 맛’, 현대의 카페들이 돌아가며 ‘근대’를 주제로 다양한 커피를 선보인다.

커피를 마시며 쉬어갈 수 있는 곳도 마련됐다. 관객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은 2층에 위치한 ‘그릴’이다. 그릴은 경성 최초의 서양식 레스토랑으로, 이상의 소설 ‘날개’에도 등장한 바 있다. 중앙 커피 바(Bar)를 중심으로 등받이가 높은 대합실 의자가 둘러 놓였는데,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근대의 어느 살롱에 온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곳에선 매뉴팩트, 보난자커피, 프릳츠커피, 헬카페 등 현대의 커피숍이 기간별로 ‘근대’를 주제로 한 커피를 선보인다. 물론 커피값은 공짜. 단, 매시간 60잔 한정으로 제공한다.

1층 복도 ‘커피바’와 인스턴트 커피자판기가 놓인 ‘오아시스’에서도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이 밖에도 오늘의 커피와 함께 탁구 경기를 즐길 수 있는 ‘윈터클럽’, 신구 세대의 음악가들이 자신의 애청곡을 직접 디제잉 하는 ‘토요 디제이 부스’ 등 다양한 체험 행사가 진행된다.

문화역서울284 관계자는 "동시대의 커피문화와 커피를 통한 사회적 관계망,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통해 유기적이며 혼종적인 문화를 담아가고 있는 한국의 커피사회를 들여다보길 바란다"고 밝혔다.

전시를 둘러 보고 남은 커피를 들이켜는데, 로비 중앙의 DJ 부스에서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가 흘러나왔다. 1925년 지어진 옛 서울역 한가운데서, 1980년 발매된 가왕의 히트곡을 듣자니 미지근한 커피에서도 향이 나는 것 같다. 그 옛날 문예 다방에 모였던 문인들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전시는 내년 2월 17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