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서른아홉 살 한국인 신부가 흙먼지 날리는 아프리카 남수단 시골 마을 톤즈(Tonj)에서 외진 집을 돌며 주사를 놓고 붕대를 감았다. 그때 약통 들고 따라다니며 신부님을 돕던 열여섯 살 남수단 소년이 한국에 건너와 의사가 됐다.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은 21일 고(故) 이태석 신부의 도움으로 이 신부의 모교인 한국 인제대 의대에 유학 온 토마스 타반 아콧(33)씨가 2019년도 의사국가시험 실기시험에 합격했다고 발표했다. 한국 온 지 9년 만에 이태석 신부의 후배가 된 것이다. 토마스씨는 또렷한 한국말로 "앞으로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마친 뒤 외과 전문의가 돼서 고향으로 돌아가 신부님의 사랑을 갚겠다"고 했다. "형제가 '8남1녀'"라는 말도 한국말로 했다. 그는 그중 다섯째다.

李신부가 꾸린 '톤즈 밴드' 1호 멤버 - 토마스 타반 아콧(사진 왼쪽 흰색 원으로 표시)씨는 고(故) 이태석(사진 오른쪽) 신부가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에서 조직한 브라스밴드의 멤버이기도 했다. 토마스씨는 이태석 신부가 톤즈에서 의료 봉사를 할 때 약통을 들고 따라다니며 신부를 도왔다. 2009년 이태석 신부의 제안으로 한국에 온 그는“외과 전문의가 돼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 많이 하겠다. 그게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신부는 2001년부터 8년간 남수단에서 의료·교육 봉사를 하다 대장암에 걸려 2010년 마흔여덟 살로 선종했다. 이 신부가 톤즈에서 인술을 베풀 때 토마스씨는 천주교 재단 중학교에 다녔다. 처음엔 이 신부의 복사(服事·사제의 미사 집전을 돕는 평신도)였고, 다음엔 약통을 메고 이 신부와 나란히 들길을 걷는 조수였다. 이 신부가 주사를 놓을 때면 토마스씨가 아이들을 붙잡고 있었다. 말라리아와 콜레라가 창궐하고 내전이 이어지는 땅에서, 이 신부는 마을 아이들 35명을 모아 브라스밴드를 꾸렸다. 토마스씨가 '1호 멤버'였다.

이 신부는 2008년 휴가차 귀국했다 대장암 투병을 시작했다. 남수단에 남아있던 토마스씨가 이듬해 한국에 건너와 이 신부가 머물던 서울 대림동 살레시오 수도원에 찾아가 1주일간 머물렀다. 임종 하루 전, 다시 찾아가 작별 인사를 했다. 토마스씨는 "신부님 얼굴이 수단에서 본 모습과 너무 달랐다"고 했다.

"얼굴, 팔, 다리 살이 엄청 빠졌는데, 배는 많이 나오고…. 충격받아서 아무 말도 안 나왔어요. 신부님이 제 마음을 아셨는지 편하게 해주려고 농담을 하셨어요. 뭐라고 하셨는지는 기억이 안 나네요."

이 신부의 뜻에 따라 인제대와 사단법인 수단어린이장학회가 토마스씨의 학비를 댔다. 첫 2년은 연세대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웠고, 3년째 되던 해 김해에 있는 인제대 의대에 '12학번'으로 입학했다.

'울지마 톤즈' 이태석 신부가 품은 아이, 한국서 의사되다 - 고(故) 이태석 신부가 의료·교육 봉사를 했던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 출신인 토마스 타반 아콧씨가 21일 의사국가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토마스씨는 이태석 신부의 권유로 2009년 한국으로 유학 와 인제대 의대를 올 초 졸업했다. 외과 전문의가 돼 고향 환자들을 돌보는 게 꿈이다. 이 신부가 선종한 뒤 그의 삶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가 나와 수많은 관객을 울렸다. 지난 2월 인제대 졸업식 후 토마스씨가 교내에 있는 이태석 신부의 흉상에 학사모를 씌우고 있다.

그때부터 경상도 사투리 알아듣느라 영화 '친구'를 보며 한국어 공부를 했다. "부산 친구, 구미 친구, 대구 친구 세 명이 사투리가 다 달랐어요." 의대 교과서 보는 건 더 어려웠다. "제가 한자를 모르잖아요. 무릎관절을 슬관절이라고 하더라고요."

최석진 인제대 의대 교무부학장이 "의학 용어 중엔 우리나라 학생도 모르는 한자가 많은데, 그래도 끝까지 독하게 외운 제자가 토마스"라고 했다.

다행히 음식은 잘 맞았다. 산낙지, 청국장, 개고기 세 가지만 못 먹는다. 그는 "라면 중엔 신라면이 최고"라고 했다.

토마스씨는 "처음엔 졸업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졸업을 하고 보니 의사 시험도 합격할 수 있겠더라"고 했다. 졸업 후 치른 첫 시험에선 실기시험에 떨어져 낙방했다. "떨어진 첫날은 너무 괴로웠는데 둘째 날 되니 '한국 친구들도 떨어지는데…' 하고 털어냈어요."

그는 "신부님은 제가 한 번도 한국에 유학 오라는 이유를 말해주신 적이 없다"고 했다. 많은 아이들 중 왜 자신에게 기회를 줬는지 짐작만 할 뿐이다. "여기서 열심히 의학을 배워 우리나라에 돌아가 어려운 사람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게 그분이 원하시는 거라 생각해요."

유학 생활 동안 고향에 네 차례 다녀왔다. 비행기표 값이 비싸, 더 자주 갈 처지가 못 됐다. 작년 2월 남수단에서 별세한 아버지도 한국에서 마음으로만 임종했다. 토마스씨는 "아버지가 무슨 병인지 진단도 못 받고 돌아가셨다"면서 "내가 더 빨리 의사가 돼 돌아갔다면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죄책감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힘들 때 이 신부가 자주 하던 말을 되새겼다. "토마스, 열심히 하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어. 그런데 나중에 열심히 하겠다고 하지 말고, 지금 바로 열심히 해야 해." 이 신부가 살아있었다면 지금 뭐라고 했을 것 같냐고 묻자, 그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잘 했어, 수고했어, 앞으로 좋은 일 많이 해'라고 하셨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