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 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은 12일 정전협정을 차후 대체할 수 있는 '한반도 평화협정' 초안을 공개했다. 유엔군사령부 해체, 북한 비핵화 완료를 전제로 한 '한·미 간 구조적 군비통제 착수' 등이 담겼다. 국책 연구기관 차원에서 평화협정 초안 전문을 발표한 건 문재인 정부 들어 처음이다. 문 대통령은 그간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수차례 밝혀왔다.

통일연구원 김상기 통일전략실장은 이날 서울 중구 더플라자호텔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총 9개 조항으로 구성된 평화협정 초안을 발표했다. 김 실장은 협정 체결 시점에 대해 "북한의 비핵화 약 50% 달성 시점"이라면서, 이를 2020년 초반으로 가정했다. 협정 체결로 비핵화를 더욱 촉진할 수 있으며, 미국 대선(2020년 11월)이 다가올수록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국내 정치적 부담이 커진다는 점을 고려했다고 김 실장은 밝혔다.

연구원은 남·북·미·중 4자가 서명하는 포괄협정 방식을 채택했다. 남북뿐만 아니라 미·북, 미·중 등 양자(兩者) 간 체결해야 할 합의 역시 일부 포함됐다. '정전협정에 따라 일시 정지됐던 한국전쟁을 공식적으로 종료한다'는 내용을 1조 1항으로 하는 이번 초안은 유엔사 해체 외에도 '미·중 핵무기 한반도 전개·배치 금지' '외국군과 대규모 연합 훈련 금지' 등이 담겼다.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됐다는 점은 포함하지 않았다. 북한에 대해선 '2020년 이내 모든 핵물질 폐기'를 요구했고, 비핵화 완료 이후 '주한미군 감축'을 시사하는 조항도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서해 북방한계선(NLL) 문제는 유보해 이날 학술회의에서도 논란이 됐다.

연구원이 이날 공개한 '한반도 평화협정 구상'은 전문(前文)과 9조 34항으로 구성됐다. 연구원 측은 "연말 완료 예정인 연구 과제"라고 했지만, 공개 학술회의에서 연구 결과 전체를 선(先)공개하는 건 이례적이다. 일각에선 "정부가 국책 연구기관을 통해 여론을 떠보려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다. 이를 발표한 김 실장은 기자와 만나 "정부와 조율하고 만든 안은 아니다"라고 했다.

이번 초안을 두고 일각에선 "북한에 지나치게 유리한 안"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연구원은 평화협정 발효 이후 90일 안에 유엔사를 해체하고 남·북·미·중이 참여하는 '한반도 평화관리위'를 설치하자고 했다. '미국은 조선(북한)에 안전 보장을 제공하고 어떠한 형태의 무력도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확약하며, 조선도 미국에 대해 동일하게 확약한다' '당사자들은 유엔 안보리의 모든 제재가 해제될 수 있도록 공동으로 노력한다'는 조항도 넣었다. 이는 모두 북한이 직·간접적으로 요구해온 사항들이다. 연구원은 여론이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선 복수의 안을 제시했다. 서해 북방한계선(NLL)에 대해선 '서해상 경계에 대해 계속 협의한다'는 안과 '계속 협의하되, 경계선 확정 시까지 기존 북방한계선을 존중한다'는 안을 함께 제시했다.

주한미군 문제와 관련해서도 '한국과 미국은 조선의 비핵화 완료 이후 한반도의 구조적 군비 통제에 착수한다'는 원칙론과 함께 '비핵화가 완료되는 2020년 이내에 주한미군의 단계적 감축에 관한 협의에 착수한다'는 내용을 대안으로 올렸다.

연구원은 "북한의 비핵화 완료 이후 주한미군도 한반도의 구조적 군비 통제에 동참한다는 내용의 조항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앞서 "주한미군은 한·미 동맹의 문제다. 평화협정 체결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했던 문재인 대통령의 언급과는 다른 내용이다.

연구원은 '미국 핵우산 철수'와 관련해서도 '미국은 조선의 비핵화 완료 이후 한국에 확장 핵억지를 제공하지 않을 것임을 공약하며, 중국도 조선에 확장 핵억지를 제공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재확인한다'는 문구를 대안으로 포함했다.

함께 학술회의에 참석한 일부 패널도 초안 일부 내용에는 의문을 제기했다. 문성묵 한국국가전략연구원 통일전략센터장은 NLL 문제를 유보한 데 대해서 "기왕 평화협정을 맺는다면 해상 경계선을 확정하는 자리여야 한다고 본다"고 했다. 조남훈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재밌고 형식적으로 갖춰야 할 것들이 대부분 잘 들어가 있다"면서도 "논란이 되는 NLL이나 유엔사 해체 등의 문제가 다 제시돼 있는데 정말 깊이 생각해서 한 것인지 묻고 싶다"고 했다.

해당 초안에 대한 질문이 쏟아지자 사회를 맡은 이종석 전 통일부장관은 "이 안이 정부안이 될까봐 걱정하시는 분이 많은데 그게 아니다"라며 진화에 나서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