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사이드|다이애나 E.H. 러셀·질 래드퍼드 엮음|전경훈 옮김|책세상|722쪽|3만3000원

캐나다 소설가 마거릿 애트우드가 남성인 친구에게 물었다. 남자들은 왜 여자들에게 위협을 느끼냐고. 그 친구는 답했다. "남자들은 여자들이 자기를 비웃을까 봐 두려워하지." 그 후 애트우드는 일군의 여성들에게 물었다. 여자들은 왜 남자들에게 위협을 느끼냐고. 그들은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살해당할까 두려워요."

책은 이 일화를 소개하며 남녀의 서로에 대한 공포가 불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영국·인도 페미니즘 연구자 40여 명이 '페미사이드(femicide)', 즉 '여성혐오 살해'라는 사회 현상을 기술하고 설명한 논문과 에세이를 엮었다. '페미사이드'란 용어를 안착시킨 미국 사회학자 다이애나 러셀이 영국 페미니스트 활동가 질 래드퍼드와 협력해 편찬했다. 1992년 처음 출간된 페미니즘 분야 '고전'으로 이제야 국내에 소개됐다. 저자들은 '페미사이드'를 가장 극단적 형태의 성차별적 테러리즘으로 규정한다. 동기는 여성에 대한 혐오, 경멸, 쾌락, 소유 의식이다. 출간된 지 오래됐지만 책이 다루는 문제의식은 세월이 무색하게 우리 현실과 맞닿아 있다.

지난달 40대 남성이 전처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강서구 주차장 살인 사건'은 '페미사이드'의 전형이다. 별거 중인 아내를 추적해 살해하는 사건은 경찰 수사 파일에선 아주 흔한 항목이다. 1974~83년 캐나다에서는 남편에게 살해당한 여성 524명 가운데 117명(22%)이 남편과 이미 별거 중이었다. 남자들이 떠나려는 여자를 굳이 붙잡아 살해하는 것은 그들이 여자들을 성과 생식을 위한 '소유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누구도 너를 가질 수 없다'는 비뚤어진 여성 의식이 페미사이드의 방아쇠로 작용한다.

연구자들은 "모든 가부장제 사회들이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일종의 징벌 또는 사회적 통제로 페미사이드를 사용해 왔고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면서 "남자들은 자신들이 정의한 여성의 적절한 역할대로 살지 않으려는 여자들을 처벌하는 수단으로 페미사이드를 이용해 왔다"고 주장한다. 1976~1987년 미국에서 일어난 15세 이상 여성 살인 사건 통계에 따르면 살인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확인된 경우 중 살인자의 3분의 1은 남편이었다. 페미사이드의 위험에 가장 많이 노출돼 있는 여성은 남편 및 자녀와 함께 사는 여성이다. 여성들은 집에 있어야 안전하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바로 그 집 안에서 남편과 연인에게 폭행당하고 살해당한다.

22일(현지 시각) 칠레 산티아고에서 열린‘세계 여성 폭력추방의 날’기념식 전야 행진에서 한 여성이 페미사이드 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 책이 발간됐을 당시만 해도 서구 사회는 페미사이드를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성이 남성 파트너에게 살해당한 사건을 보도하는 언론의 태도가 대표적이다. 많은 언론이 페미사이드 사건을 '사랑에 눈이 먼' 남자가 '우발적으로' 저지른 '비극'이란 식으로 보도했다. 페미사이드를 저지른 남성들은 종종 셰익스피어 비극 '오셀로'의 주인공처럼 영웅시됐다.

여성이 살해를 유발했다는 시각도 있었다. 1981년 영국 윈체스터에서 페미니스트 메리 브리스토가 전 남자친구 피터 우드에게 살해됐다. 피고 측 대리인은 메리가 피터하고만 성관계를 맺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면서 메리가 피터를 '도발'했다고 주장했다. 판사는 배심원에게 전달하는 사건 개요 설명에서 메리가 죽음을 자초했다는 견해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피터 우드는 18개월형을 선고받았다. "평결이 지닌 함의는 명확했다. 여자들이 관계를 맺고 있는 남자들보다 더 똑똑하고, 더 강하고, 더 독립적이라면, 그들이 이 부적절한 남자들에게 지배되기를 거부한다면 그들은 자신의 죽음에 법적 책임이 있다."(439쪽)

책은 17~18세기 마녀사냥, 인도에서 빈번히 자행되는 여성 영아 살해, 포르노그래피의 페미사이드 함의까지 다양한 측면을 다룬다. 페미사이드에 대한 개설서로 손색이 없다. 우리 사회가 페미사이드를 숙고하게 된 건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다. 당시 가해자 규탄 시위에 나선 여성들은 '여자라서 죽었다'고 외쳤다. '나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는 해시태그(#)가 소셜미디어를 뒤덮었다. 호들갑으로 느껴지는가? 바로 당신이 이 책을 읽어야 할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