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위안부 피해 할머니 지원을 위해 만든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하겠다고 21일 공식 발표했다. 이로써 2015년 12월 체결된 한·일 위안부 합의는 '사실상 파기'의 길을 걷게 됐다.

여성가족부는 이날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는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고 추진됐다"며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에 따라 위안부 할머니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재단 해산 절차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우리 정부는 국가 간 합의를 먼저 파기했다는 외교적 부담을 덜기 위해 그동안 '위안부 합의 파기는 아니다'란 입장을 견지해 왔다. 외교부는 이날도 "위안부 합의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진정한 해결이 될 수 없으나 한·일 간 공식 합의라는 점을 감안해 이를 파기하거나 재협상을 요구하지는 않겠다는 입장에 변화는 없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 역시 화해·치유재단 해산 결정에 반발하면서도 이를 '합의 파기'로 규정하지는 않아 양국 관계 개선의 여지를 남겼다.

정부가 위안부 피해 할머니 지원을 위해 만든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하겠다고 발표한 21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 대사관 앞에서 정기 수요 시위 참가자들이 ‘2015 한일합의’라고 쓰인 종이를 찢고 있다.

그러나 합의의 골자였던 일본 정부의 예산 출연에 따라 설립된 화해·치유재단 해산이 결정되면서 실제로는 합의의 내용 대부분이 형해화됐다는 평가다. 2015년 양국은 크게 세 가지 핵심 사항에 합의했었다. ▲일본 정부 예산으로 피해자들의 상처 치유 사업 ▲최종적·불가역적 문제 해결에 따라 상호 비난·비판 자제 ▲주한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 문제의 적절한 해결 등이다. 이와 같은 핵심 내용을 이행하기 위해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의 해산은 양국 간에 이런 합의 사항이 더 이상 존속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여겨진다.

화해·치유재단은 합의에 따라 일본 정부가 내놓은 출연금 10억엔(약 100억원)으로 이듬해 7월 설립됐다. 재단은 이 출연금으로 위안부 할머니 34명과 돌아가신 위안부 할머니 유족 등에게 약 44억원을 현금으로 지급했다. 치유금 명목이었다. 이 과정에서 김복동 할머니를 비롯한 위안부 할머니 11명은 "일본의 진정한 사과가 없이 치유금 명목으로 돈을 주는 것에 반대한다"며 거부했다.

이 때문에 문재인 정부 출범 후인 작년 7월 말 외교부는 위안부 합의 내용 재검토를 시작했다. 그 결과에 따라 올해 1월에는 이 합의가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진정한 해결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일본 출연금 10억엔을 우리 정부 예산으로 충당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화해·치유재단 업무는 사실상 중단됐다. 당연직 이사진을 제외한 민간인 재단 이사진도 비판 여론 끝에 지난해 말 전원 사퇴했다.

다만 일본 출연금 10억엔 중 남은 57억8000만원에 대해선 용처를 확정 짓지 못했다. 정부는 일본 정부 출연금 10억엔에 해당하는 103억원을 지난 7월 예비비로 편성한 상황이다. 한·일 위안부 합의에 비판적인 일부 시민단체는 "일본에 반환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합의 이행'을 계속 요구하고 있는 일본 정부가 이 돈을 다시 받아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여가부 관계자는 "재단을 완전히 청산하기까지는 6개월에서 1년 가까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며 "10억엔 처리와 관련해 일본과 협의를 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일단 냉각된 한·일 관계가 어디로 갈지는 앞으로 이 10억엔의 처리 등과 관련한 협의가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달려 있다. 한·일 위안부 합의 무효를 주장해온 시민단체 정의기억연대는 이날 성명을 발표해 "화해·치유재단 해산 발표는 곧 한·일 합의 무효 선언과 같다"며 "일본 정부는 한·일 합의 이행을 운운하지 말고 피해자들의 인권과 명예 회복에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2015년 합의 당시 '일본국 내각 총리대신으로서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는 표현을 수용하면서까지 문제 봉합을 원했던 아베 신조 정권이 이런 요구를 수용할지는 미지수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닫아뒀던 한·일 과거사 관련 '판도라의 상자'가 50년 만에 새롭게 열렸다는 평가까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