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수 문화부 차장

요즘 며칠 '고종의 길'을 걸었다. 서울 중구 덕수궁길 구세군 서울제일교회 맞은편 철문이 지난달 말부터 오전 9시(월요일 제외)에 열린다. 옛 러시아 공사관(정동공원)에 이르는 약 120m 길이 나타난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일본군 감시를 따돌리고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갔던 길의 일부를 복원했다. 정확한 고증은 어렵다. 구한말 미국 공사관이 만든 지도에 'King's road(왕의 길)'라 적혀 있어 근거로 삼았다 한다.

도심 산책로가 늘어난 점은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이 길을 고종이 대한제국이라는 근대국가를 세워 일제에 저항한 상징처럼 여기는 것은 입맛이 개운치 않다. 치욕스러운 역사를 아프게 직시하지 않고 정신적으로 손쉽게 극복하려는 시도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동공원에는 '고종이 길을 떠났다. 그 길 끝에서 대한제국이 새로 시작되었다' '근대를 향한 고종의 열정' 같은 감상적 글귀를 적은 사진 설명판을 전시하고 있다.

'고종의 길'은 현 정부가 이전 정부 정책을 적폐로 규정하지 않은 매우 드문 사례에 속한다. 전전(前前) 정부 때인 2012년 3월 입안했고, 전(前) 정부 때인 2016년 10월 공사를 시작했다. 망국의 역사를 안타깝게 여기는 연민(憐憫)은 전·현 정부가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종영한 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이런 정서에 불을 질렀다. 드라마는 고종을 의병에게 밀지를 내리는 등 일제 침략에 항거한 군주로 그렸다. 고종과 대한제국을 다시 평가하게 됐다는 분이 많다.

평가할 부분이 없다는 게 아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 만인 1897년 2월 20일 덕수궁(경운궁)으로 돌아온 후 '자주독립 황제국'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토지 조사를 하는 등 그 나름대로 개혁을 추진했다. 고종은 무력한 군주가 아니었으며 일제 침략이 없었다면 대한제국은 근대화에 성공했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이런 해석은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 하지만 역사를 직시하는 태도인지는 의문이다.

정치 지도자의 도덕은 필부(匹夫)의 도덕과는 다르다. 정치가는 결과에 대해 혹독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의도가 좋았다 해서 책임이 면제될 수 없다. 고종이 선언한 대한제국은 8년 만에 일제 보호국이 되고, 13년 만에 식민지로 전락했다. 고종은 왕가(王家)를 황가(皇家)로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국가(國家)를 지키는 데 실패했다.

망국 이후 삶은 치욕스럽다. 메이지 덴노(天皇)는 조서를 내려 고종을 '태왕(太王)'으로, 순종을 '왕(王)'으로 삼았다. 고종과 그의 직계 후손은 일제 밑에서 왕족(王族)이 되고, 방계 후손은 공족(公族)이 되었다. 조선의 왕·공족은 일본 황족(皇族)보다 아래지만 귀족인 화족(華族)보다 높은 신분으로 대우받았다. 고종은 일제가 준 지위를 거부하지 않았다. 국가는 사라졌는데 '이왕가(李王家)'는 살아남았다. '왕족' 고종의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은 일제가 준 '귀족' 작위를 받았다는 이유로 단죄받은 이들과 비교할 때 형평에 어긋난다.

당대 평가는 단호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성립한 임시정부는 '왕족'을 옹립하지 않았다. 3·1운동은 고종의 인산(장례)에 맞춰 일어났음에도 임시정부는 민국(民國)을 택했다.

나라 빼앗긴 군주 이름을 내건 길이 세계 어디에 또 있는지 모르겠다. 기왕 국민 세금 들여 만든 길이라면 '연민'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망국의 원인을 되짚으며 치욕의 역사를 기억하는 현장이어야 한다. 감상적 추억이나 정신적 승리에 도취해서는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