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일산조(秋日山朝)

아츰볕에 섶구슬이 한가로이 익는 골짝에서 꿩은 울어 산(山)울림과 장난을 한다

산(山)마루를 탄 사람들은 새꾼들인가 파아란 한울에 떨어질 것같이 웃음소리가 더러 산(山) 밑까지 들린다

순례(巡禮)중이 산(山)을 올라간다 어젯밤은 이 산(山) 절에 재(齋)가 들었다

무리돌이 굴러나리는 건 중의 발꿈치에선가

―백석(1912~1996)

구획된 칸막이의 생활에 지치면 무변의 바다가, 파도 소리가 간절해지듯이. 1930년대 도시의 지식인이었던 백석은 의도적으로 고향인 평안도의 언어를 전면에 세워서 시를 발표합니다. 획일적 표준어에 대한 반발일 수 있겠고 중심에 대한 저항으로 읽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 시에서 백석은 더없이 맑은 어느 가을 아침, 울울창창한 북쪽 산의 한 풍경을 호출합니다. 그리고 산 ‘저편’의 공간을 향하여 그리움을 타전합니다. ‘섶구슬(이슬)’이 익어가는 저편으로 꿩은 날며 웁니다. ‘산울림’이 응답합니다. 산마루에선 ‘새꾼(나무꾼)들’인지 신선의 것인지 모를 웃음소리가 언뜻언뜻 ‘산 밑’까지 들립니다. ‘왜 푸른 산에 사느냐 묻거든 그저 웃지요’ 운운의 옛 시가 이렇게 새 옷을 입고 1930년대를 변주합니다. 벌목꾼들과 배고픈 순례자가 우람한 산 저편에서 인간사와 자연사를 동시에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