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커밍|미셸 오바마 지음|김명남 옮김|웅진지식하우스|564쪽|2만2000원

"사람들이 '미셸! 미셸!' 하고 불렀다. 나는 너무 피곤해서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버락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던 2009년 1월 20일 밤, 미국 최초의 흑인 퍼스트레이디가 된 이 여자는 한계에 다다랐다. 퍼스트레이디다운 발언을 할 기력도, 친구들에게 손 흔들 기력도 없었다. 붉고 두꺼운 카펫을 재빨리 걸어가서, 관저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올라탔다. 낯선 복도를 걸어 낯선 침실로 들어간 뒤, 신발과 드레스를 벗고 낯선 침대에 기어들어갔다.

지난 13일(미국 시각) 전 세계 31개 언어로 300만 부 동시 출간된 이 회고록에서 미셸 오바마(54)는 '너무 야심 많은 남자'와 결혼해 힘에 부치고 혼돈에 빠진 한 여성의 이야기를 차분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유력한 차기 대권 후보로 꼽히는 그이지만 책에서 정치적 야망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못 박는다. "나는 공직에 출마할 의향이 없다. 전혀 없다. 나는 애초에 정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지난 10년의 경험으로도 그 생각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정치의 불쾌한 측면을 아무래도 좋아할 수가 없다."

진심일까, 아니면 정치적 제스처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미셸 오바마가 '누구의 아내'란 사실을 후광 삼아 권력을 얻는 것을 탐탁히 여기는 부류의 여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썼다. "엄밀히 말해서 퍼스트레이디는 직업이 아니고, 정부의 공식 직함도 아니다. (…) 대통령에게 딸린 사이드카 같은 자리일 뿐이다."

책의 전반부는 노예의 후손으로 시카고 흑인 노동자 동네에서 태어난 그가 똑똑한 머리와 근면함 덕에 명문 프린스턴대와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하고 대형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하던 중 인턴으로 온 하버드 로스쿨 후배 버락 오바마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룬다. 버락이 미셸과 데이트하다 "키스해도 되나요?"라고 묻는 장면은 로맨스 영화처럼 달콤하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셸은 결혼 후 여성으로서 겪는 좌절에 초점을 맞춘다. 이를테면 난임 치료의 고통을 홀로 견뎌내야 하는 아픔 같은 것. "나는 가족을 꾸리고 싶었다. 버락도 가족을 원했다. 하지만 나는 혼자서 집 욕실에 앉아 내 허벅지에 주삿바늘을 꽂을 용기를 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어쩌면 바로 그 순간 정치에 대해서, 또한 버락이 흔들림 없이 정치에 몰두하는 데 대해서 처음으로 희미한 분노를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버락이 정치에 빠져 가정을 소홀히 하는 바람에 부부 상담을 받았던 일, '독박 육아'의 고통, 시카고대병원 부사장으로 승승장구했지만 남편의 정치 기반이 탄탄해질수록 자신의 야망엔 무감각해져야만 했던 슬픔에 대해서도 털어놓는다. "적어도 사회의 몇몇 영역에서는, 내가 오바마 부인이라는 사실이 나를 위축시켰다. 나는 이제 남편을 통해서 존재가 정의되는 여자가 된 것 같았다."

젊은 시절의 오바마 부부. 이들은 미셸이 변호사로 있던 시카고의 로펌에서 사수와 인턴으로 만나 결혼했다.

흑인이기 때문에 항상 '남들보다 두 배 이상 잘해야 절반이라도 인정받는다'는 말을 들으며 자라왔던 그에게 '최초의 흑인 퍼스트레이디'는 일종의 도전이었다. 어느 연방 하원 의원은 그녀의 엉덩이가 너무 크다고 조롱했다. 대중은 그녀를 '성난 흑인 여자'라 깎아내렸다. "나는 여성이고, 흑인이고, 강했다. 그런데 특정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그 사실이 '성난 사람'이라는 한 가지 뜻으로만 번역되는 듯했다."

도널드 트럼프는 흑인이자 여성으로 두 겹의 마이너리티인 그가 절대 묵인해서는 안 되는 존재로 다뤄진다. 그녀는 지난 대선 결과를 언급하면서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특히 여성들이 유례없이 자격이 출중한 여성 후보자를 놔두고 여성 혐오자를 대통령으로 선택했을까 하는 의아함을 평생 간직할 것"이라고 썼다.

순수한 회고록이건, 세간의 추측대로 차기 대선용이건 간에 이 책이 한 권의 잘 쓰인 이야기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내가 충분히 잘해내고 있을까?' 버릇처럼 자문하던 모범생 소녀가 세상을 향해 '내가 그럭저럭 해내고 있는 거 봤어?'라고 묻는 워킹맘에서 '난 충분히 훌륭할까? 그럼 물론이지!' 답하는 자신감 찬 퍼스트레이디가 되기까지의 건실한 성장기. 책 제목이 '비커밍(becoming)'인 건 무언가 '되느라' 분투해온 한 여성의 여정이기 때문이리라. 그 주인공이 앞으로 또 무엇이 '될지'는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