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년 개띠들이 은퇴한다. '부모를 섬긴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에게 버림받는 첫 세대'라고 그들은 말한다.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공포가 이 말에 담겨 있다. 자녀가 결혼이나 분가할 때는 돕겠지만 부양받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한국 사회가 받들던 효(孝)라는 덕목의 퇴장처럼 비치기도 한다.

중장년은 교과서 속 어머니의 말을 늘 반대로만 하다 마지막에 후회하는 '청개구리의 슬픔'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효도를 배웠다. '의좋은 형제'를 통해 우애도 익혔다. 그 유효기간이 끝나간다. '효는 당연히 지켜야 할 인륜'이라는 믿음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일러스트=안병현

자식과 부모는 법정에서 어색하게 등을 돌렸다. 재판이 열리는 동안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어느 날 딸이 이제부터 모실 테니 미리 증여를 좀 해달라고 해요. 사위 놈 사업이 어렵다며 얼마나 보채는지…." 60대 박모씨는 지난해 노후 자금 2억원이 든 통장을 딸에게 건넸다. 딸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잠시나마 머뭇거린 자신이 부끄러웠다고 한다.

딸 부부는 다음 명절부터 연락이 뜸해졌다. 전화해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기를 수차례. 같이 살자는 약속은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 미뤘다. 정년 퇴임 후 생활비를 달라고 요구했지만 형편이 어렵다는 소리만 돌아왔다. "불효는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지, 내 자식이 이럴 줄은 몰랐어요. 아들놈하고 며느리는 '왜 상의도 없이 돈을 줬느냐'며 눈에 불을 켜고 대들더군요."

부모와 자식이 부양 문제로 갈등하며 법정 소송을 벌이는 사례가 10년 전 150여 건에서 지난해 255건으로 늘었다. 대부분 부모가 자식에게 재산을 증여했는데 왜 모른 체하느냐며 토해내거나 부양을 책임지라고 다툰다. 차마 법적 대응은 못 하고 가슴앓이하는 경우까지 더하면 부지기수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 접수된 부양 관련 상담 건수는 해마다 폭증하고 있다.

계약이 된 효, '불효자 방지법'도 등장

이런 다툼을 막으려고 '효도 계약'을 맺기 시작했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 갑과 을이 돼 증여하고 그 대가로 효도를 약정하는 것이다. 일종의 보험과 같아 부모는 심리적 위안을 얻는다. 법무법인 세종 김현진 변호사는 "증여를 생각하며 로펌을 찾는 10명 중 4명은 효도 계약서를 쓴다"며 "수십억 자산가만 오는 게 아니다. 불안한 경제 상황과 맞물려 다양한 사람들이 효도 계약에 관심을 보인다"고 했다.

한국 사회에 '효도 계약'이 본격 등장한 것은 2015년. 그해 12월 대법원은 부모를 잘 모신다는 조건으로 부동산을 물려받고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아들에게 재산을 돌려주라고 판결했다. 민법은 '증여한 재산은 반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대법원은 효도 계약이 증여 계약을 해제할 수 있는 '부담부증여(負擔附贈與)'라고 판단해 길을 터줬다.

'58년 개띠'는 100만명이 넘는다. 이 베이비붐 세대는 산업화와 고도성장, 군부 독재와 민주화 운동, IMF와 정리 해고를 겪었다. 그들이 은퇴를 시작하면서 효도 계약 이야기가 부쩍 늘었다. 자식에게 이 말을 꺼내기가 쉽지는 않다. 결혼을 앞둔 자녀를 둔 최모(60)씨는 "나이가 들수록 자식 눈치가 보이는데, 자식이 '나를 못 믿느냐'고 생각할 것 같아 조심스럽다"고 했다. 효도 계약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몇 번이나 삼켰다는 것이다.

최씨는 장사로 번 돈 1억원을 아들의 전세금에 보탰다. 그런데 통장 잔고가 바닥을 보이자 앞이 캄캄해졌다. "아들이 매달 돈을 보낸다고 하지만, 주변에선 며느리가 어깃장을 놓는 경우도 있고 부모와 자식이 다툰다는 뉴스도 들려 가슴 철렁할 때가 많다"고 했다. 부모 세대는 '자식을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배웠다. 자식이 결혼이나 이사, 사업 등을 이유로 손을 벌리면 주머니를 탈탈 털어서 돈을 건네는 게 일반적이었다.

최근 효도 계약서를 쓰는 부모들은 다르다. 변호사 등 제3자부터 찾는다. 증여할 때 효도 관련 조항을 삽입하는 게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법무법인 민주 서정욱 변호사는 “부모 마음과 달리 자식이 언짢아하는 경우도 있다”며 “자식에겐 ‘증여 시 혜택과 부양 조건이 지켜지면 문제가 없다’고 여러 번 강조한다”고 했다.

좋은 효도 계약은 무엇보다 구체적이어야 한다. 김현진 변호사는 “자녀가 1년에 몇 차례 방문해야 하는지, 부양비나 치료비는 얼마나 주는지 등을 명시하는 게 좋다”며 “막연하게 쓰면 제대로 이행했는지 가늠하기 어려워 법적 분쟁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무엇이 됐으면 좋겠다’ ‘형제끼리 우애를 지켜라’ 같은 기원(祈願)은 금물이다. ‘구체적 계약 내용을 지키지 않을 경우 재산을 반환한다’는 내용은 꼭 담으라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국회는 한발 더 나갔다. 이른바 ‘불효자 방지법’을 발의한 것이다. 불효자 방지법에는 ‘부모 재산을 물려받은 자식이 부양 의무를 이행하지 않거나 부모를 상대로 패륜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재산을 돌려줘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노명선 성균관대 로스쿨 교수는 “윤리와 도덕처럼 추상적 영역에서 머물던 효도가 법과 계약이라는 현실 영역으로 진입한 것”이라고 했다.

설문조사로 드러난 세대 격차

효도가 법과 계약의 문제가 된 건 경제 문제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주말’은 이달 초 SM C&C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 프로(Tillion Pro)’에 의뢰해 20~60대 남녀 5074명을 설문 조사했다. ‘효도한다고 느낄 때는 언제인가’란 물음에 4명 중 1명은 ‘경제적 지원을 할 때’라고 답했다.

세대 차이가 뚜렷이 나타났다. ‘법적 효도 계약이 필요하다’는 데 가장 큰 공감을 나타낸 그룹은 60대 여성(33%)이었다. 50대 여성(32%), 40대 여성(31%)이 뒤를 이었다. 다른 연령층 남성보다 7~9%가량 높은 수치다. 김봉석 성균관대 사회학과 초빙교수는 “여성은 평균수명이 남성보다 긴 데다 현실적인 삶에 대한 고민도 상대적으로 많다”며 “나이가 들수록 경제력을 우선 가치라고 여기는 것”이라고 했다.

‘효도는 의무인가’라는 문항엔 50대 남성(88%)이 가장 크게 공감했다. 남자가 여자보다, 고연령이 저연령보다 의무라고 답하는 비중이 높았다. 여성은 20대(61%)가 가장 낮았고 30대(67%), 40대(70%) 순으로 나타났다. 틸리언 오남경 팀장은 “50대 남성은 부모를 섬기는 마지막 세대라는 자의식이, 반대로 여성은 효도가 시댁 쪽에 국한돼 있다는 불만이 응답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부모의 노후를 책임져야 하느냐’는 물음에서도 세대 격차가 드러났다. 50~60대는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응답이 45%로 나타났다. 20대는 22%, 30대 24%, 40대도 35%로 상대적으로 낮았다. 2040 세대가 부모에게 드리는 적정 용돈(생활비)은 매달 10만~30만원(38%), 30만원 이상(23%), 50만원 이상(15%), 100만원 이상(5%) 순이었다. ‘안 드린다’는 응답은 5%였다. 신정일 서울가정법원 공보판사는 “50~60대는 대체로 장남이 재산을 물려받고 부양을 전담한 세대”라며 “자식 세대는 그렇지 않아 충돌이 생기는 것”이라고 했다.

유교 문화는 급격히 해체되고 있다. 조상을 섬기는 방식부터 달라졌다. 명절에 차례를 지내지 않고, 벌초는 대행 업체에 맡긴다. 제사가 많은 집에서는 편의상 하루에 합쳐 지내기도 한다. 살아 있는 부모에 대한 효도도 예외가 아니다.

효와 부양에 대한 세대 차가 갈등을 낳고 있다. 국민연금이 대표적이다. 20~30대는 평생 연금을 붓다 막상 받아야 할 시기가 되면 연금 기금이 동나지 않을까 염려한다. 소득대체율을 올리고 보험료율을 묶으면 2054년쯤 고갈된다는 전망이 나오자 젊은 계층이 크게 반발하기도 했다. 직장 입사 2년 차인 김모씨는 “국민연금을 적게 내고 많이 받는 부모 세대와 달리, 미래 세대는 많이 내고 적게 받는 구조라 불합리하다”고 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국민연금을 환급하고 의무 가입을 폐지해달라는 청원이 꾸준히 올라오고 있다.

진정한 효도란?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중 부동산이 있는 사람은 59%. 이들의 평균 재산은 1억2000만원이다. 그러나 상대적 노인 빈곤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10.6%의 4배 수준인 42.7%로 회원국 중 1위다. 자식에게 재산을 증여하지 않으면 노인 빈곤율이 크게 낮아질 수 있다는 뜻이다. 임춘식 전국노인복지단체연합회 회장은 “증여 대신 주택 연금이나 농지 연금으로 돌리면 궁핍하지 않을 노인이 많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적절한 대안 중 하나로 효도 계약을 꼽는다. 이상혁 하나은행 상속증여센터장은 “증여를 할 때 간단한 효도 계약을 병기하면 노인 빈곤율과 고독사 등을 낮출 수 있다”고 했다. 김현진 변호사는 “효도까지 계약을 한다는 식으로 비판할 게 아니라 가족 분쟁을 예방하는 수단으로 바라봐야 한다”며 “자식이 먼저 효도하겠다는 마음을 담은 조항을 말하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효도 계약은 공짜가 아니다. 돈이나 부동산 같은 재산을 대가로 한다. 그래서 재산이 부족한 이들은 상실감을 토로한다. ‘아무튼, 주말’은 서울 지하철 1호선 역사와 탑골공원, 노인정 등지에서 설문 조사에 담지 못한 70~80대를 만났다. 정해진 목적지 없이 무료 전철을 타고 떠돌거나 장기판이 벌어지는 뒷골목을 전전하며 외로움을 달래는 노인들이다.

이들은 ‘자식들에게 더 주지 못해 미안하다’면서도 ‘돈이 없어 버려진 신세가 됐다’는 얘기를 했다. 탑골공원에서 만난 민모(82)씨는 “자식네 집에서 살지만 며느리에게 밥을 달라고 하기 민망해 무료 급식을 먹으러 온다”며 “자식 내외가 무시하듯 말하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말했다. 서울 성동구 한 노인정에서 만난 최모(78)씨는 “남들만큼 못해준 것만 기억나 자식에게 미안하다”면서도 “효도라는 단어도 생각 안 해본 지 오래”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재화뿐 아니라 ‘가치 상속’에 눈뜨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법무법인 헤리티지의 최재천 변호사는 “우리보다 먼저 고령화를 겪은 일본이나 선진국인 미국에선 가문의 명예, 정신, 가치관을 승계하는 문화가 정착돼 있다”며 “이런 무형의 가치를 발전시키는 게 상속의 본래 취지”라고 했다.

가치 상속을 위해선 세대 교류와 소통이 더 활발해지고 노인의 지혜가 대접받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게 전문가 의견이다. 석재은 한국노인복지학회 회장은 “노후 소득 보장과 적절한 일자리 제공이 맞물려야 노인에 대한 인식이 개선될 수 있다”며 “이를 바탕으로 경제적 상속 뿐 아니라 정서적 교류를 가능케 할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