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엔 할머니, 할아버지가 스위스 한가운데 한국이란 섬에 동떨어져 사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 가족에게는 유배, 실향, 동화(同化)의 어려움이 내재해 있었다."

한국계 프랑스 작가 엘리자 수아 뒤사팽(26)의 소설 '파친코 구슬'이 국내 출간됐다. 프랑스와 스위스를 오가며 자란 작가는 데뷔작 '속초에서의 겨울'로 두 나라에서 신인 문학상을 동시에 받았다. 지난달 마크롱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의 엘리제궁 만찬에 초대받기도 했다. 이메일로 만난 뒤사팽은 "프랑스와 한국의 문화를 잇는 다리 역할을 인정받아 영광이었다. 오래전부터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연결하는 일을 꿈꿔왔다"고 했다.

소설은 한국계 스위스 여성 클레르가 일본 도쿄에서 파친코를 운영하는 조부모를 방문하는 이야기. 프랑스 출판 전문 월간지 '리르'는 "아름답고 간결한 언어로 기원을 탐구한다. 문화, 언어, 세대를 넘나들며 화합과 단절의 이미지를 섬세하게 보여준다"고 평했다. 뒤사팽은 "한국어를 듣고 이해할 순 있지만, 말은 잘하지 못한다. 소설은 '절반의 한국인'으로 느낀 소통의 어려움에서 시작됐다"고 했다.

2013년부터 매년 두세 달을 일본에 머무르며 소설을 구상했다. 그는 "통역가의 도움을 받아 재일 교포들을 인터뷰했고, 파친코에서 일하는 친구를 통해 그 세계 어두운 뒷면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일본과 한국, 어느 쪽 편을 들고 싶진 않았다. 처음엔 역사적 사실들을 많이 넣었지만, 나중엔 대부분 걷어내고 드라마에만 집중했다."

뒤사팽은 “가끔 연극배우로 무대에 선다. 몸과 목소리로 새로운 방식의 스토리텔링을 연습한다”고 했다.

소설 속 할아버지의 파친코는 고독한 공간으로 묘사된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파친코 주변에 갇혀 살아간다. 그들의 사회생활은 구슬을 자질구레한 물건들과 바꿔주는 것으로 한정된다. 구슬 백 개는 생수, 천 개는 초콜릿, 만 개는 전기면도기, 0개는 위로 삼아 껌 하나." 모아둔 재산도, 가족도 없는 노인들이 은퇴 후 파친코에 취업해 아침부터 밤까지 일한다.

한국어를 고집하는 할머니는 손녀 클레르를 "아이구, 예쁜 새끼"라고 부른다. 작가는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도 항상 '아이구'란 말을 썼는데, 그 한마디에 한국인이 말하는 방식이나 생활 방식이 담겨 있는 것 같다"면서 "이성적인 프랑스어에 비해, 한국어는 감정을 표현하는 말들이 굉장히 다양하다"고 했다.

소설은 가족 간 소통의 어려움과 세대 간 단절을 드러낸다. 클레르와 그의 조부모 모두 일본어를 할 수 있지만,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영어와 한국어, 몸짓을 섞어가며 불완전한 대화를 나눌 뿐이다. "개인 경험이 반영됐다. 학교에 들어가면서 한국어 실력이 점점 줄었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대화도 점차 줄었다. 그들도 영어를 할 수 있었지만 왠지 할머니 할아버지와는 꼭 한국어로 말해야 할 것 같았다."

'파친코 구슬'을 비롯해 최근 젊은 한국계 외국 작가들이 재일 교포를 소재로 쓴 소설이 잇따르고 있다. 한국계 미국 작가 이민진의 '파친코'는 지난해 뉴욕타임스와 BBC에서 '올해의 책 10'에 선정됐다. 재일 교포 3세 최실이 쓴 '지니의 퍼즐'은 신인 문학상을 휩쓴 뒤 아쿠타가와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미국과 유럽이 난민 문제에 직면한 가운데, 한국계 작가들이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역사에 대해 말하고 싶은 욕망을 느낀 것이 아닐까. 슬픈 역사가 다시 시작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