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기억력 좋거든. 전에 너 분당 샛별마을에 살고… 그 좌석버스 1005-1번 타고 다녔던 것도 기억하는데…" "명찬이 오빠는 취해서 실려가고... 오빠가 데려다줬었죠. 1005-1번 좌석버스 타고."

영화 ‘광식이 동생 광태’에서 주인공 광식(김주혁)과 짝사랑 상대 윤경(이요원)을 이어주던 그 버스. 분당·강남·서울역의 새벽을 달리던 수도권 직행좌석버스의 대표 노선 1005-1이 지난달 28일 폐선했다. 1995년 개통한 지 23년만이다. 1005-1은 한국 최대 버스 운송회사 KD운송그룹을 만든 ‘일등공신’으로 꼽히지만, 경쟁 버스·지하철 노선의 등장에 세월을 이기지 못했다.

2013년 7월 19일 서울역 앞에서 촬영한 1005-1버스.

◇직행좌석버스 '표준' 만든 전설의 노선… 학생·취준생 달래주던 '새벽버스'
1005-1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수도권 직행좌석버스'의 시초격으로 불린다. 1005-1은 '프리미엄 서비스'를 내세웠다. 휴대전화가 드물던 당시 공항 리무진에서나 볼 수 있던 공중전화를 설치했고, 신문과 사탕을 무료로 나눠 준 적도 있다. 1995년엔 교통카드 첫 시험운영 대상으로 뽑혔고, 1997년에는 정류장안내·뉴스 속보를 제공하는 차내 전광판도 국내 최초로 도입했다. 고속버스나 관광버스가 아닌, 노선 버스 기사가 정장을 입고 운전한 것도 이 버스가 처음이다.

당시로서는 빠르게 신도시 강남으로 ‘직행’한다는 게 강점이었다. 분당에서 강남을 향하는 노선 대다수가 수서역을 경유하던 때, 홀로 경부고속도로에 진입해 양재IC를 거쳐 강남에 직통했다. 현재 강남에서 서울역을 향하는 ‘표준 노선’인 한남대교 - 남산1터널 - 명동성당을 달린 좌석버스도 1005-1이 최초다. 이전까지 강남에서 서울역을 향하는 버스는 서울고속버스터미널 - 반포대교 - 남산3호터널을 거쳤다. 1005-1은 고속버스터미널 승객 수요를 버린 대신 ‘속도’를 얻은 것이다.

1005-1이 개통한 1995년은 분당 신도시 입주가 한창이던 때다. 버스는 늘어나는 출퇴근 수요와 함께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1997년 외환위기는 1005-1의 ‘전성기’로 꼽힌다. 치솟는 기름값에 대중교통 이용이 늘자, 강남과 광화문을 향하는 직장인 수요가 몰린 것이다. 1990년대 후반 1005-1의 인가대수는 총 130여대에 달했다. 분당·강남·서울역을 130개의 버스가 ‘열차’처럼 이어 달리던 때다.

1995년 교통카드 시험운영 대상으로 꼽힌 1005-1 버스. 당시 교통카드는 모두 선불이었다. 큼지막한 인식기가 인상적이다.

시민들은 1005-1을 ‘심야버스’로 기억한다. 1005-1 막차는 새벽 2시에 서울역에서 출발해 차고지에 새벽 4시쯤에야 도착했다. 분당에 20여년간 살았다는 이지은(29)씨는 "택시는 엄두도 못내던 대학시절, 신촌·강남에서 자정 넘어서까지 술을 마실 때면 ‘구세주’ 같던 버스"라며 "새벽녘 술 취한 몸을 눕히면 순식간에 집 앞이었다"고 말했다.

늦은 밤까지 공부에 매진하던 수업생·취준생에게도 1005-1은 고마운 버스였다. 유학생 정세헌(28)씨는 "고등학생 때 강남역 어학원에서 영어공부를 마치면 늘 1005-1을 타고 귀가했다"며 "내겐 수험시절의 상징 같은 버스"라고 했다. 분당에 거주하는 이상훈(30)씨는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던 때, 종로의 학원에서 자습하다 보면 새벽 1시를 쉽게 넘기곤 했다"며 "자정을 넘어 새벽 1시쯤이면 다른 버스는 막차가 모두 사라지는데, 그땐 1005-1이 유일한 대안이었다"고 추억했다.

◇ 신분당선·N버스 개통에 수요 잠식…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한때 분당 거주민의 발 노릇을 하던 1005-1의 숨통을 끊은 건 2011년 말 지하철 신분당선의 개통이다. 분당 정자역과 2호선 강남역을 18분만에 오가는 지하철의 등장에 좌석버스는 서서히 외면 받기 시작했다. 분당 거주민 조한수(28)씨는 "신분당선 개통 이후 1005-1을 탄 기억이 몇 없다"며 "수요가 줄어드니 배차 간격이 넓어져 더욱 더 찾지 않게 된 것 같다"고 했다.

1995년 당시 1005-1 버스의 모습.

2013년부터 N13·N37 등 종로와 강남역을 잇는 ‘올빼미버스’가 신설되며 심야 강북 도심과 강남을 오가는 수요조차 빼앗겼다. 이들 버스의 막차는 새벽 3시를 넘어선다. 한때 130대에 이르던 인가대수는 서서히 줄어들어, 올해 하반기 들어선 단 3대가 운행할 뿐이었다.

1005-1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대학생 김동욱(25)씨는 "며칠전 1005-1이 오지 않아 다른 버스를 타고 강남에서 귀가했다"며 "버스 정류장에서 별다른 공지를 보지 못했는데, 뒤늦게 사라졌단 이야길 들어 안타깝다"고 했다. 회사의 기틀이던 노선을 쓸쓸히 퇴장시킨 KD운송그룹도 아쉽긴 마찬가지다. KD운송그룹 관계자는 "적자 누적에 따른 폐선"이라며 "(폐선이라) 회사 차원에서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긴 어렵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