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땅에서 시작해 앞만 보고 달렸어요. 문득 마당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부산 한 보험회사에서 은퇴한 이경호(57)씨는 해양대 졸업 후 배를 탔고, 이후 회사원으로 인생 전반전을 보냈다. 쉰 살 전에 은퇴해 집을 짓겠다고 하자 펄쩍 뛰던 아내 안수경씨와 '밀고 당기기'를 한 끝에 집 짓는 데 합의했다. "건축가 찾는 데만 5년이 걸렸어요. 영 마음에 드는 설계사무소가 없어서 길가다 괜찮아 보이는 집 있으면 무턱대고 들어가 '누가 지었느냐' 물어본 적도 있지요."

수소문 끝에 만난 건축가는 이기철(41) 아키텍케이건축사사무소 소장. "2주마다 우릴 만나서 그냥 일상적 대화를 하더군요. '어떤 집을 짓고 싶은지 알아야 한다'며 독후감 같은 숙제를 내고요." 이 소장은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이 뭔지 충분히 고민할 시간을 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경남 김해에 지어진 ‘멋진 할아버지집’을 앞에서 바라본 모습. 외관을 뒤덮은 대나무와 금속 패널이 눈에 띈다. 아래 사진은 집을 뒤에서 바라본 모습.

설계에 10개월, 시공사 찾는 데 반년, 짓는 데 다시 10개월. 경남 김해 시골 마을 꼭대기에 내려앉은 '멋진 할아버지집(대지면적 675㎡, 연면적 188.28㎡)'은 그렇게 탄생했다. 건축비로 3.3㎡(1평)당 700만원대가 든 이 집은 올해 한국건축문화대상 본상, 한국건축가협회 아천상, 시카고 아테나움 국제건축상 등을 잇달아 받았다. 이경호씨는 "손주들에게 멋진 할아버지가 되고 싶어 문패를 붙였다"고 했다.

이 소장은 "도시에 살다 은퇴를 앞두고 시골로 가는 부부를 보고 전형적인 베이비붐 세대를 떠올렸다"고 했다. "한국적 집이라고 하면 양반들 살던 한옥을 떠올리는데, 이 집은 흔한 시골집을 원형으로 했어요. 베이비붐 세대가 성장기를 보냈고, 다시 돌아가고 싶어하는 곳이기도 하죠."

멋진 할아버지집은 베이비붐 세대의 정체성과 연관돼 있다. 시골집을 현대적 소재로 해석한 것이 전후 농경사회에 태어나 산업화·정보화를 겪은 그들 삶과 닮았다. 좌우로 길쭉한 집 앞에 서면 전면 외관을 뒤덮은 대나무가 먼저 눈에 띈다. 기와와 서까래를 현대화한 것이다. 김해에 자생하는 대나무 숲에서 600그루를 골라왔다. 대나무를 가마에서 72시간 구워 강도를 높인 뒤 금속 패널에 단단히 결합해 만들었다. 측면·후면에는 노출 콘크리트와 시멘트 벽돌을 주로 썼다. 이 소장은 "회색으로 검소하고 소박한 느낌을 주려 했다"고 말했다.

집은 거실과 부엌·침실이 있는 본채와 사랑방 역할을 하는 '취미실'로 이뤄졌다. 취미실은 남편 취향에 맞게 전통 가옥 느낌을 냈다. 방 하나가 국선도, 서예, 색소폰 연주 공간으로 쓰인다. 이 소장은 "한 공간이 여러 용도로 쓰이는 것이 우리 주거 공간의 특징"이라고 했다. 본채는 철저히 아내 의사를 따랐다. 밝은 목재와 노출 콘크리트로 도심 주택처럼 만들었다. 주출입문에서 안으로 들어가면 거실·주방·침실이 차례로 나오는 구조. 벽면엔 통창을 내 자연경관과 연결했다.

부부는 각자의 취미를 즐기고 마당을 꾸미며 산다. 이들은 "집 세 채쯤 짓는 데 들어갈 노력과 시간을 한 채에 쏟아부어야 후회 안 한다"며 "생활양식이 시골과 잘 맞을지도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2층을 올렸는데 계단 오르기 싫어 2층에 몇 달에 한 번 올라간다는 사람, 건축가와 연을 끊은 사람도 봤어요. 평생 일해서 집 한 채 짓는 거잖아요. 준비 없는 은퇴를 지양해야 하듯 집도 마찬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