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생 때 할아버지를 뵈러 가면 '환자를 불쌍히 여기는 의사가 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약을 받으려고 해외 진료소 앞에 쪼그려 앉아 밤새우는 아이들을 볼 때면 늘 그 말이 떠오릅니다."

'한국의 슈바이처' 고(故) 장기려(1911~1995) 박사의 친손자인 장여구(54) 인제대 서울백병원 외과 교수는 "평생 의료 봉사의 길을 걸어온 할아버지를 두고 봉사를 말하려니 부끄럽다"고 했다.

장기려 박사는 평양에서 외과의사로 일하다 6·25전쟁 때 월남, 부산에서 복음병원(현 고신의료원)과 청십자병원을 세워 피란민과 가난한 이들을 무료로 돌봤다.

장여구 인제대 서울백병원 외과 교수는 “내게 봉사는 매일 삼시 세끼 챙겨 먹는 일처럼 당연한 일상”이라고 말했다.

손자인 장 교수는 장기려 박사의 봉사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7년 사회 각계각층 인사들이 주축이 돼 창단한 블루크로스의료봉사단을 이끌고 있다. 인제대백병원 의사·간호사 50여 명으로 구성된 블루크로스는 '장기려 무료 진료소'를 만들어 노숙인과 차상위 계층,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의료 봉사를 해왔다. 2001년부터는 1년에 세 차례씩 미얀마·캄보디아·라오스 등을 찾아 지금까지 해외 빈민층 1만2000여 명을 무료로 진료해줬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장 교수는 지난 1월 국민추천포상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그가 봉사단에 합류한 건 2003년. "바쁘다는 핑계로 참여하지 않았다가 뒤늦게 필리핀에 다녀왔어요. 진료 후 환하게 웃으며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왜 이제야 왔을까, 할아버지가 크게 혼내시겠다'생각했죠." 2007년부터 봉사단장을 맡았다.

장 교수 집안은 조부인 장기려 박사부터 현재 중앙대 의대에 재학 중인 그의 아들까지 4대에 걸친 의사 가문이다. 장 교수의 아버지인 고(故) 장가용 전 서울대 의대(해부학) 교수는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본부장을 맡아 장기 기증 문화 확산을 위해 노력했다. 장 교수는 "의대생 아들도 기회 될 때마다 의료 봉사에 참여한다"며 "봉사는 중독"이라고 했다.

지난해 11월 캄보디아 프놈펜 헤브론 병원에서 장여구(맨 위 오른쪽) 교수가 환자 가족과 찍은 사진.

매년 10~11월에 떠나는 '캄보디아 수술캠프'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정이다. "지난해 7남매를 둔 캄보디아 여성 환자의 갑상샘 종양 제거 수술을 했습니다. 혹이 없어진 수술 부위를 신기한 듯 만져보던 네 살배기 아들의 미소가 아직도 기억나네요. 몸이 파김치가 돼도 그 표정 때문에 계속하게 됩니다."

국내 의료 봉사도 소홀하지 않는다. 매달 두 차례 서울 등촌9동 종합사회복지관에 마련된 '장기려 무료 진료소'에서 봉사한다. 전국 농어촌 독거 어르신들도 찾아 건강을 살핀다. "60년 전 전쟁 통 속에서 천막 진료소를 짓고 사람들을 돌보던 할아버지의 그 마음 그대로 사람들을 돕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