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기자(왼쪽에서 둘째)가 지난 22일 서울 구로구에서 4m 길이 장대를 들고 은행나무 열매들을 털어내고 있다. 채취반 인부들과 은행을 수거하는 트럭, 나무 높은 곳에 닿을 수 있는 크레인이 뒤로 보인다.

"눈 감으세요! 눈 뜨고 위 쳐다보면 다쳐요!"

은행 열매가 후두두 떨어져 헬멧을 사정없이 때렸다. 4m 길이 장대로 위쪽 은행나무 잔가지를 툭툭 치자 열매 한 다발이 얼굴로 돌진했다. 지름 3㎝ 안팎 굵은 은행 알들이 대로변에 흩어졌다. 인부 여섯 명이 포대에 흩어진 은행을 쓸어 담았다. 20㎏ 포대 한 자루가 꽉 차자 옆에서 대기 중이던 1t 트럭에 옮겨 싣는다. 트럭 위로 올린 포대는 15개. 오전 작업량이다.

한쪽에는 소형 크레인 한 대에 인부 한 명이 탑승해 5m 높이 고목 위로 올라간다. 장대가 닿지 않는 높은 가지에 달린 은행을 털었다. 주황색 공사장용 안전 고깔 4개를 세우고 안전요원 셋이 주위를 살피며 보도를 통제했다.

지난 22일 Why?는 서울 구로구청 '은행 열매 기동채취반'과 함께했다. 작업 장소는 구로구 가마산로 174. 이날 털 은행나무는 어린이집 담벼락에 기대선 거대한 가로수였다. 은행 잎과 은행 열매는 대접이 하늘과 땅 차이다. 노랗게 물든 잎은 가을의 서정이지만, 발아래 떨어진 은행 열매는 악취를 풍긴다.

민원과의 전쟁

"냄새 나는데 뭐해요? 안 치우고?"

은행 열매 민원이 들어오면 구청은 난리가 난다. 휴일엔 당직실 전화가 불이 날 정도. 많으면 하루에 7~8건이다.

"예산이 부족하니까 동시다발로 못 하고 순서대로 할 수밖에 없어요. 어쩔 수 없이 늦게 가는 곳이 생기기도 해요. 일이 밀려 좀 늦게 가야 할 때면 미안할 따름이죠." 구로구청 공원녹지과 배성철 조경팀장의 말이다. 기동채취반은 주말에도 출동한다. 하지만 채취반 7명이 모두 작업해도 온종일 25그루 이상 작업하기가 어렵다. 구로구 관내 은행나무 수는 3200그루. 그중 은행 열매를 맺는 암나무는 861그루. 전체의 총 24% 정도다.

채취반의 주 활동 시기는 9월 말부터 한 달여다. 공원녹지과에서 채용하는 기간제 근로자 인력을 활용한다. 지원자는 주로 60~70대다. 이 중 체력이 좋은 12명을 뽑아 6명씩 2개 조로 운영한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8시간 일한다. 종종 크레인 타고 위로 올라가야 하는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일당은 7만8000원.

뭣보다 냄새가 고역이다. 채취반 채영숙(67)씨는 "은행 냄새 때문에 사람들이 슬금슬금 피하는 것도 서운하지만 작업하고 나서 바로 씻기도 어려워 가을 내내 이 냄새를 끼고 산다"고 말했다. 장대로 잔가지를 털어내던 김면종(73)씨는 "목이 끊어질 듯 아프고 어깨도 결리고 근육통이 온다"고 했고, 도현문(64)씨는 "크레인 타고 올라가 엉킨 가지를 톱으로 솎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고 했다. 이구동성 "중노동"이다.

예산은 빠듯하다. 서울시청 조경과는 지난 9월 말 서울시내 25개 구에 은행 채취 보조금으로 각 1000만원씩을 교부했다. 소형 크레인 한 대를 하루 동안 빌리는 데 드는 돈은 50만원 남짓. 9월 말부터 시작해 20여일 진행하면 예산이 동난다. 1t 트럭 1대와 전동 수확기 1대, 장대 10개, 사다리 2개 등을 동원해야 해서 자잘한 예산 부담은 커진다. 하루에 많아야 25그루 정도 작업할 수 있어 구로구에 있는 암나무 861그루를 전부 하려면 한 달이 꼬박 걸린다.

가로수가 바뀐다

그렇다면 '털린 은행들'은 어디로 갈까. 구로구청에서는 일단 열매 지름이 3㎝ 이상 되는 큰 것만 선별해 과육을 제거하고 오류 IC 인근 녹지대에서 건조 작업을 시행한다. 도로변에 있는 가로수라 중금속 등 유해 성분 검출 여부를 확인한 다음 복지정책과로 보내 '구로 희망 푸드마켓'에 기증한다. 작년엔 60㎏ 정도를 불우이웃돕기로 제공했다. 구로구청 관계자는 "요즘은 환경이 나빠져서 나무들이 버텨내려고 작은 열매를 많이 맺기 때문에 먹을 수 있는 열매는 오히려 점점 적어지는 추세"라고 말했다.

채취 작업을 지켜보던 한 시민은 검은색 비닐봉지 가득 떨어진 열매를 담으며 "열매를 까서 프라이팬에 볶아 먹으면 맛있다"며 "호프집처럼 집에서 은행 안주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약 치는 게 걱정돼서 주워가질 못하겠어요." 옆에서 지켜보던 행인 이모(78)씨가 말하자 배 팀장이 받아쳤다. "은행나무는 벌레가 별로 없어 약을 안 쳐요."

실제로 은행나무는 병해충이 없고 분진이 적은 데다 가을 도심을 낭만적으로 물들여 1980년대 이래 '대표 가로수'로 사랑받아왔다. 하지만 최근엔 은행 열매 민원으로 매번 채취반 운영에 예산이 너무 많이 들어 각 구청은 대안을 찾느라 바쁘다.

일단 새로운 나무를 심을 때 DNA 검사를 한 다음 암수를 구분해 수나무만 집중적으로 심는다. 혹은 정류장, 지하철 출입구 등 민원 다발 지역에 10여 그루 정도, 암나무를 수나무로 바꿔 심는 사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최근 트렌드는 가로수종 자체를 바꾸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배 팀장은 "요즘은 은행나무보다 왕벚나무, 이팝나무, 느티나무를 주로 심는다"고 설명했다. 봄꽃이 예쁜 왕벚나무, 이팝나무는 주민들이 밀집한 주택가에 심는다. 여름 그늘이 장점인 느티나무는 대로변에 심어두면 가지가 옆으로 뻗어나가 더위를 쫓아준다.

노란 잎을 따 책갈피로 쓰던 1980년대 낭만적 풍경도 악취 민원에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산림청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전국적으로 '뽑아낸' 은행나무 암나무만 5300여 그루. 각 광역자치단체에서 체계적으로 '악취로 인한 교체·제거 사업'을 진행 중이다. 머지않아 수목원에 가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