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 100주년을 맞은 1968년 일본 공영방송 NHK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를 주인공 삼아 대하드라마를 내보냈다. 료마는 사쓰마·조슈 동맹을 성사시켜 메이지 유신을 이끈 풍운아다. 30대 초반 막부(幕府) 측에 암살당했다. 시바 료타로 소설을 토대로 만든 이 드라마는 1년 내내 매주 일요일 프라임 시간대에 방영되면서 메이지 유신 붐을 이끌었다. 드라마와 소설의 영향으로 일본인들은 집권 막부 쪽과 유신 활동가 모두 의리와 이상이 넘쳤던 인물로 기억한다. 사토 내각은 '근대화 성공' 100년을 축하하는 행사를 떠들썩하게 펼쳤다. 도쿄올림픽을 성공시키고 경제성장을 구가하던 일본의 자부심이 하늘을 찌를 때였다.

▶메이지 유신 전에도 한·일 간의 국력 차이는 크게 벌어져 있었지만 일본이 근대화에 대성공을 거두면서 우리에게는 재앙이 닥쳤다. 근대화 일본이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잇달아 승리해 세계를 놀라게 하는 뒤에서 무지몽매한 조선은 국권을 빼앗겼다. 서양 세계는 이를 당연한 일처럼 여겼다. 오늘 일본 정부는 메이지 유신 1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치른다.

▶메이지 유신을 이끈 지방 중의 하나가 야마구치현이다. 메이지 유신 50년(1918)엔 데라우치 마사타케, 100년 때 사토 에이사쿠, 올해 아베까지 50년마다 야마구치현 출신이 총리였다. 아베는 다시 강한 국가를 만들겠다며 유신 적자(嫡子)를 자처해왔다. 일본 역대 총리 중 이곳 출신이 가장 많다.

▶역사학계는 메이지 유신의 기점(起點)을 왕정복고를 단행한 1868년 1월 3일로 본다. 오늘은 일본이 연호(年號)를 '메이지(明治)'로 바꾼 날이다. 당시 일왕은 새 연호를 공포하기 전날 관료들이 제안한 이름 중 제비를 뽑아 '메이지'를 결정했다고 한다. 주역에 나오는 말로 '밝게 다스린다'는 뜻이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아시아의 역사는 어둡게 흘렀다.

▶메이지 유신이 군국주의로 치달으며 2000만 넘는 아시아인이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으로 숨졌다. 일본은 핵폭탄을 맞고 항복했다. 전후 일본에선 메이지 유신의 비극적 종말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메이지 유신 150주년 기념 열기도 예전 같지는 않다고 한다. 근대화 경쟁에 낙오했던 우리는 해방 후 세계 역사에 남을 경제 기적을 이룩했다. 하지만 150년의 부침을 겪었어도 한·중·일 3국 중 여전히 선진국은 일본뿐이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