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

한 치 앞도 내다보이지 않던 대학 시절 나는 온갖 ‘가지 않은 길’을 기웃거렸다. 아나운서가 되면 어떨까 싶어 당시 서울 남산에 있던 KBS 방송국을 기웃거리던 어느 날, 성우들이 연속극을 녹음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공중에 매단 마이크 주위에 모여 서서 각자 대본을 손에 쥔 채 마이크 가까이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는 성우들 모습은 참으로 정겨웠다.

요즘 나는 한때 그리던 성우의 삶을 살아보고 있다. 그렇다고 방송국에 취직한 것은 아니고 네이버 오디오클립에서 '최재천의 생명 읽기'와 '통섭원 손님과 어머니'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전자는 오디오북인데 내가 쓴 책 중에서 가장 아끼건만 애석하게도 가장 안 팔리는 '열대 예찬'을 낭독한다. 후자는 주요섭의 '사랑 손님과 어머니'를 제목만 패러디해서 만든 팟캐스트인데, 지금까지 철학자 엄정식, 건축가 승효상, 미술 평론가 기혜경, '공룡 박사' 이융남 교수 등을 차례로 모시고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혼자 듣기 정말 아까운 콘텐츠들이다.

연애 시절 아내는 낭랑한 내 목소리를 좋아했단다. 몇 년 전만 해도 TV 강연이나 인터뷰 때 사회자에게 영화배우 한석규씨의 목소리를 닮았다는 황송한 칭찬을 듣기도 했는데, 뒤늦게 찾은 성우 생활이 요즘 나를 슬프게 한다. 세월은 어쩔 수 없는지 내 귀에 들리는 내 목소리는 어느덧 너무 거칠어졌다. 어떤 이는 열대 탐험가에게 잘 어울리는 목소리라지만 내겐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외우고 배웠던 시(詩) ‘가지 않은 길’이 실제로는 가장 잘못 이해한 시란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는데/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노라고/ 그래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한탄하는 회한의 시인 줄로만 알았는데, 잘 읽어보면 시인은 “그날 아침 두 갈래 길에는 똑같이/ 밟은 흔적이 없는 낙엽이 쌓여 있었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가지 않은 길은 그저 가지 않은 길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