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법정(法定) 절차와 기한을 지키지 않는 게 우리 정치권에서는 이젠 제도화된 모양이다. 현행 선거법에 따르면 다음 총선 실시 1년 전까지 선거구를 획정해야 하며, 이를 위한 선거구획정위원회를 총선 18개월 전인 지난 15일까지 설치했어야 하지만 모두 감감무소식이다. 이달 5일까지 선거구 획정위원도 확정했어야 하는데 그마저 아무 진척이 없다.

법정 시한을 지키고 선거구 획정의 중립성 등을 높이기 위해 지난 총선부터 선거구획정위원회는 선거관리위원회 산하기관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당초 국회의장의 자문 기구였던 획정위원회를 선관위 산하로 옮긴 것은 정파나 지역의 이익이 아닌 국민의 정치적 견해를 공정하게 반영한 선거구 획정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20대 총선 선거구획정위원회도 이런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이는 선거구획정위원회 구성과 운영의 한계 탓이 크다. 현재 9명인 획정위원 중 8명은 여야가 4명씩 동수(同數)로 추천하는 구조이다. 9명 중 8명이 정파적 인사인 셈인데, 정당 간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사안을 놓고 대립이 불가피하다. 획정위가 어떤 결정을 하려면 특별 의결 정족수로 위원의 3분의 2가 동의해야 하는데, 여야 어느 한 쪽에서 최소 한 명이 자신을 추천한 정당을 배신해야 한다.

국회는 정치개혁특위를 통해 선거제도 개편과 선거구 획정 기준, 의원 정수(定數) 등에 대한 논의를 곧 시작한다. 하지만 정파 간 이견이 커 제대로 진행될지 의문이다. 올해 지방선거 때도 같은 이유로 선거구 획정이 제때 이뤄지지 못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선거구 획정위원의 실질적 구성권과 획정위의 결정권을 갖고 있는 정당의 영향력을 줄이면 된다. 예를 들어 여야 정당별 국회 추천 몫을 줄이고 선관위 역할을 확대하거나 획정위원 추천위를 통해 획정위원의 선정 과정과 절차를 강화하는 방식이 가능하다.

우리 국회도 선진국처럼 법정 기한에 맞춰 선거구를 획정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제때 정해진 절차에 따른 투명하고 중립적인 선거구 획정은 예측 가능한 정치의 출발점이다. 이를 위해 정치권의 협조와 시민사회, 학계의 참여가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