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국립대 A 교수는 지난 6월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한 호텔에서 열린 와셋(WASET·세계과학공학기술학회) 행사에 참가했다. 별도의 발표 자료도 없이 인사말만 2분가량 하고 내려왔다. 하지만 연구 논문이 채택됐다. A 교수는 주변에 "사비로 다녀왔다"고 했지만 확인 결과 한국연구재단에 수백만원의 출장 경비 신청을 한 상태였다.

한 정부 출연연구기관 소속 B 연구원은 지난 7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와셋 행사에 다녀왔다. 당초 1박 2일 일정으로 열릴 예정이었지만 반나절 만에 학회 행사가 끝나자 나머지 시간에 도심 관광을 하고 귀국했다. 이 연구원은 소속 기관에 470여만원을 출장비로 신청했다.

국내 과학계 연구자들이 돈만 내면 논문을 실어주고 발표 기회를 주는 이른바 '가짜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지난 5년간 수십억원의 세금을 낭비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혈세로 해외 유명 관광지에서 열리는 부실 학술대회에 참석하고 마치 권위 있는 해외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한 것처럼 자신의 연구 실적으로 올렸다.

10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국회 박광온 의원(더불어민주당)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14년부터 올 6월까지 정부 출연연구기관 21곳과 과학기술원 4곳 소속 연구원 260명이 와셋과 '오믹스(OMICS)' 등 부실 학회에 참석하는 출장 비용으로 총 10억4623만원을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출연연과 과학기술원을 통틀어 가짜 학회 출장비를 가장 많이 타간 곳은 한국한의학연구원으로 최근 5년간 26명이 총 31번 가짜 학회에 참가하며 1억2152만원을 썼다.

과학계에서는 대학까지 합치면 지난 5년간 가짜 학회에 들어간 돈이 40억원을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과기부 조사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와셋·오믹스에 참가한 국내 연구자는 모두 1578회 1317명으로 이 중 1057명이 대학교수이다. 가짜 학회가 주로 파리·바르셀로나·로마 등 유럽 유명 관광지에서 열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1회 참가비를 최소 300만원이라고 쳐도 47억원 이상이 들어갔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 학회들은 논문 발표와 출판 등 형식만 갖췄을 뿐, 학회 참가비나 논문 출판비를 받아 운영하는 영리단체에 가깝다. 미국·유럽에서도 '가짜 학회'로 분류돼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미국 법원은 지난해 오믹스에 대해 심사 형태, 출판 수수료 등을 속였다며 허위 정보 게재 금지 가처분 명령을 내렸다.

가짜 학회 사태는 국내 과학계의 도덕 불감증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 국립대 공대 교수는 가짜 학회 참석에 대해 "학회 참가 비용이 크지 않아 대학원생들이 참가한다고 했을 때 그냥 가라고 했다"며 "어쨌든 논문을 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논문들은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독일 한 방송국이 논문 작성 소프트웨어로 만든 가짜 논문을 제출했는데도 최우수발표상을 줄 정도로 논문 심사 과정이 허술하기 때문이다.

박광온 의원은 "정부가 가짜 학회에 발표한 논문도 연구 실적으로 인정해주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만큼 해외 학회들의 부실 여부에 대하여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실제로 한 서울 사립대의 연구원은 "정부 연구비는 기한 안에 모두 써야 하기 때문에 연구 실적을 채우지 못했을 때는 이런 해외 학술 행사에 가서 쉽게 논문 실적을 올리는 연구원들이 꽤 있다"고 했다.

노정혜 연구재단 이사장은 "반복적으로 부실 학회에 참가한 연구자에 대해서는 징계와 연구비 회수에 나설 계획"이라며 "현실과 맞지 않는 연구비 집행 규정도 손보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