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에 풍등 날리다 43억 태워먹은 스리랑카인
법조계 "입증도 어럽고, 처벌도 무겁지 않아"

"공사장 바닥에 떨어져 있는 풍등을 보고 순간 호기심이 일어 불을 붙였습니다. 갑자기 분 바람 때문에 풍등이 저유소로 날아갈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저유소 화재 피의자 스리랑카인 A씨)

기름 260만리터를 17시간이나 태운 고양 저유소 화재. 경찰은 이 화재가 기름탱크 인근에서 풍등을 날린 스리랑카인 근로자 A(27)씨의 과실로 발생한 것으로 보고 형법상 ‘중실화(重失火)’ 혐의를 적용해 수사 중이다.

7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한송유관공사 고양 저유소에서 기름탱크 폭발 화재가 발생했다. 불은 화재 발생 17시간 만인 8일 오전 3시58분쯤 완전 진화됐다.

법조계 "'중실화죄' 적용자체가 틀렸다"
중실화죄(重失火罪)는 업무상 과실이나 중대한 과실로 인해 공용 건조물이나 타인의 물건 등을 불에 태워 훼손한 사람에 대해 최고 3년 이하의 금고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중실화 혐의는 ‘중대한 과실’이 전제돼야 한다. 판례상 중대한 과실은 ‘주의 의무를 현저하게 위반했을 때’를 말한다. 손쉽게 그 위험을 알 수 있음에도 이를 게을리 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돼야 하는 것이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경찰은 저유지가 풍등을 날린 지점에서 300m밖에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위험을 알 수 있었다고 보고 중실화 혐의를 적용했는데, 300m가 ‘먼 거리’인지 ‘짧은 거리’인지에 대한 해석부터 다를 수 있다"며 "현재 발표된 경찰의 수사 결과만으로 볼 때 스리랑카인이 자신의 행동으로 저유지에 불이 날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했다. 검찰도 이날 경찰이 신청한 구속영장을 반려하면서 "혐의 입중에는 수사가 부족하다"고 밝혔다. 풍등과 저유소 화재 사이의 인과 관계에 대한 소명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중실화죄, 적용돼도 감옥 안간다.
중실화죄의 처벌은 '최고 3년 이하의 금고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이다. 단순 실화로 인한 처벌(1500만원 이하의 벌금)보다 무겁지만, 실제 이 혐의로 실형이 내려진 경우는 드물다.

서울중앙지법 한 판사는 "판례를 살펴봐도 중실화 혐의로만 재판에 넘겨진 경우에는 주로 집행유예나 벌금형이 내려진 선고가 많았다"고 했다. 서울고등법원 판사도 "중실화죄에 따른 법정형 자체가 상당히 낮은 데다 이번 사고의 경우 사람이 다치지 않아 실형까지 나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중실화죄가 흔하지 않은 예외적인 범죄라 양형을 가늠키는 어렵다"면서도 "피해액(약 43억원 추정)이 크다는 점이 변수지만 통상적으로는 실형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1991년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한 점포 내에서 전기방석 전원 코드를 뽑지 않고 귀가했다가 당시 돈으로 140억여원의 재산피해를 낸 신모(당시 33세)씨가 중실화 및 중과실치상죄로 재판에 넘겨졌지만 금고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엄청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사람도 부상했으나 초범인데다 화재로 인해 본인도 큰 피해를 입은 점을 감안, 집행유예를 선고한다"고 했다.

2010년 여자친구를 위해 모텔에서 촛불 이벤트를 벌이다가 모텔 한 층을 모두 태운 20대 남성에게는 금고 6월에 집행유예1년이 선고됐다. 재판부는 "과실범인데다 피고인이 든 보험으로 피해액이 대부분 변제되기 때문에 집행을 유예한다"고 했다.

2012년에도 모텔에서 촛불 파티를 하다가 불을 내 다른 투숙객 두 명을 숨지게 한 커플이 항소심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두 사람은 1심에서 금고 1년을 선고받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대부분 피해자와 합의가 됐고 피고인들이 결혼을 약속한 젊은이로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기도 전에 손해배상 책임을 계속 감당해야 하는 점 등을 고려해 집행유예를 선고한다"고 금고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지난 7일 오전 경기도 고양 저유소 CCTV의 모습. 스리랑카 외국인 근로자가 풍등을 날리는 모습과 풍등이 저유소 잔디밭에 떨어져 불이 붙는 모습이 찍혔다.
지난해 12월 광주 북구 두암동 A(여·23) 씨의 아파트에서 불이 나 작은방에 있던 A 씨의 자녀 3명이 숨지고, A씨가 팔과 다리에 2도 화상을 입었다. 사진은 화재 진화 뒤 집 내부 모습.

◇방화 가능성은? 매우 낮다
가능성은 낮지만 경찰 수사 결과 방화로 결론난다면 범인은 중형을 피할 수 없다. 형법상 공익에 공하는 건물에 방화한 경우에는 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돼 있다. 여기에 사람이 다쳤을 경우에는 최소 형량이 징역 7년 이상이다.

올해 초 ‘광주 3남매 참사’가 그랬다. 지난해 12월 광주광역시의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화재로 3남매가 숨진 참사 때, 용의자로 지목된 모친 B(24)씨에 대해서 경찰은 중실화와 중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했다. 검찰은 그러나 이 여성이 일부러 불을 질렀다고 보고 현주건조물방화치사 혐의로 재판에 넘기며 무기징역형을 구형했다. 재판부는 B씨의 혐의를 방화로 판단, 징역 20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민사는 별개다. 다만 스리랑카인 A씨의 책임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고양 저유지를 관리하는 대한송유관공사가 화재 등 각종 사고에 대비한 보험에 가입된 상태라, 이번 피해는 해당 보험사가 대부분 부담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