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소아의 생전 모습.

포르투갈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1888~1935)가 죽은 뒤 그의 방에서 커다란 트렁크가 발견됐다. 영어·포르투갈어·프랑스어로 쓴 2만여장의 시와 산문들이 가방 속에 흐트러져 있었다. 리스본에서 태어난 페소아는 포르투갈 영사였던 의붓아버지를 따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여러 언어를 배웠다. 여섯 살 때 새 이름을 짓기 시작해 죽기 전까지 120여개 이름으로 정체성을 바꿔가며 시를 썼다.

1982년 원고 더미에서 추려낸 산문집 '불안의 책'이 출간되면서 페소아는 변방의 포르투갈 문학을 유럽 모더니즘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천재 시인'이 된다. 미국 평론가 헤럴드 블룸은 셰익스피어, 괴테와 더불어 서양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 26인 중 한 명으로 페소아를 꼽았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철학의 사고방식은) 아직도 페소아를 논할 자격이 없다"고 했다.

국내엔 낯설었던 먼 나라 시인이 독서 시장에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민음사는 5일 페소아의 시선집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과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를 동시 출간했다. 문학과지성사는 시가집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를 10일 선보인다. 지난여름엔 페소아를 주제로 한 포르투갈 여행기 '페소아: 리스본에서 만난 복수의 화신'(아르테)이 나왔다.

작가들이 먼저 '페소아 열풍'을 이끌었다. 김연수·배수아·심보선 등 유명 작가가 저서나 칼럼에서 페소아를 예찬하면서 독자들도 "페소아가 누구냐?"며 찾아보기 시작했다. 소설가 배수아는 번역까지 나섰다. 그가 번역한 페소아의 산문집 '불안의 서'(봄날의책·2014)는 800쪽 넘는 벽돌책인데도 10쇄를 찍어 1만부 가까이 팔렸다. 박지홍 봄날의책 대표는 "처음엔 독자 수요가 있을까 걱정했는데 품절될 때마다 '구하고 싶다'는 독자들의 연락이 와서 깜짝 놀랐다"고 했다.

페소아 바람은 세계적인 추세다. 정과리 문학평론가는 "세계 시의 흐름을 주도하던 영미권 시가 힘을 잃으면서, 기존의 관습을 거부하고 인간 정서를 진솔하게 드러낸 페소아가 세계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됐다"면서 "침체된 국내 문학의 돌파구를 찾고 싶은 작가들이 이리저리 헤매다 비영미권의 시인 페소아를 발견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처음 페소아를 접한 독자에겐 120개의 '이명(異名)'이 매력으로 다가온다. 다중인격처럼 여러 자아를 만들고 생애와 성격, 스타일까지 다르게 창조한다. 페소아 연구자이자 최근 세 권의 시집을 번역한 김한민(39)씨는 "재미난 유희였을 수도 있고, 정신적 치유를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면서 "인터넷에서 여러 얼굴로 살아가는 현대인처럼 페소아는 자기 안의 수많은 자아를 문학으로 승화시켰다"고 했다.

페소아의 친구였던 포르투갈 화가 알마다 네그레이로스가 그린 페소아의 초상화. 중절모와 콧수염, 동그란 안경은 페소아의 트레이드 마크다.

포르투갈에 대한 관심도 인기 요인 중 하나다.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2013)의 흥행을 시작으로 포르투갈 리스본이나 포르투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급증했다. 생의 대부분을 포르투갈에서 보낸 페소아의 시에도 항구 도시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시 '해상 송시'에서 그는 텅 빈 부두에 들어오는 여객선을 보고 노래한다. "들어온다, 그리고 아침도 함께 들어온다, 그리고 강의/ 여기저기에서, 바다의 삶이 잠에서 깨어난다."

페소아는 시 '담배 가게'에서 어린 소녀에게 말한다. "어서 초콜릿을 먹어!/ 봐, 세상에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 모든 종교들은 제과점보다 가르쳐 주는 게 없단다." 김한민 작가는 "철학자들이 사랑한 시인이지만, 일상의 소재로 철학을 했기 때문에 처음 접하는 독자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을 것"이라고 했다.